히아신스
헤어졌던 옛 연인을 다시 만나면 이런 기분일까? 머쓱하지만 익숙해서 편안하고, 다른 사람 만나보니 네가 최고더라 싶어서 더 마음에 쏙 드는 기분 말이다. 요즘 내 마음이 이렇다.
15년 동안 같은 일을 했다. 남의 돈 벌면서 느껴지는 모든 악감정을 꾹꾹 눌러가면서 마치 감정 없는 기계인 것처럼 살았다. 그렇게 눌러 담아뒀던 감정 상자가 어느 날 펑하고 터져버렸다. 평생 나는 똑같은 모습으로만 살아야 할까? 100세 시대에 인생의 절반쯤은 다른 사람으로 살아보고 싶었다. 뉴스와 SNS를 보면 N잡러가 대세라는데, 할 줄 아는 게 고작 하나뿐인 나 자신이 초라해 보였다. 단조로운 내 생활에 종지부를 찍겠다며 과감히 사표를 내던졌다.
학창 시절 자신 있는 과목을 물으면 생각할 필요도 없이 수학이라 대답했다. 회사에서는 하루종일 숫자 더미에 쌓여 살았다. 동료들이 나를 반갑게 부르는 순간 역시 숫자가 필요할 때였다. 계산기인가 싶을 만큼 지겹도록 숫자는 내 몸에 착 붙어살았다. 그러던 내 삶이 회사를 벗어나는 순간 달라졌다. 아무도 나에게 숫자를 묻지 않았다. 심지어 오늘이 며칠인지 잊고 살만큼 나는 숫자와 멀어졌다.
대신 내 생활은 꽃향기와 재미있는 읽을거리, 예쁜 그림으로 채워졌다. 직장 생활하면서 힘들 때마다 위로가 되어줬던 꽃을 더 가까이, 더 자주 즐겼다. 공자님 말씀을 매일 만나다 보니 내가 꽤 괜찮은 사람이 되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동안 관심을 두지 않았던 인문학 책을 읽기 시작했고, 나도 글 쓰는 사람이 되어보고 싶다며 브런치 작가가 되어 매주 한편씩 에세이를 발행했다. 글을 쓰다 보니 내 글을 표현해 주는 그림 한 장 정도는 내 손으로 그릴 줄 알았으면 하는 욕심이 생겼다. 그래서 디지털 드로잉을 배우기도 했다. 이전과는 다르게 말랑말랑하고 다채로운 삶을 사는 것 같아서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딱 하나 아쉬운 것, 돈을 벌 수 없다는 것 빼고 모든 것이 마음에 들었다.
1년 반동안 취미로 즐기던 것들을 중심에 두고 고민해 봤다. 이것들로 내가 수익화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좋아하는 일을 해야 즐기면서 오랫동안 일할 수 있다고 하니까 두 번째 직업은 꼭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고민하면 고민할수록 작아지는 나를 발견하게 됐다. 심지어 좋았던 꽃이 부담으로 다가왔다. 수려한 문장을 쓰는 작가님들의 글을 보면 내가 쓴 글은 다 책상 서랍 깊숙한 곳에 숨겨버리고 싶었다. 그림은 뭐, 몇 장 그려보지도 않았으니 고민의 대상이 될 수도 없었다.
결국 나는 다시는 쳐다보지 않을 것 같았던 숫자 세계에 발을 들이기로 결심했다. 회사로 돌아가지는 않았지만, 조금 방향 전환을 했을 뿐 결국 또 내가 하는 일은 숫자를 가지고 노는 일이다. 낮에는 아이들에게 백분율의 개념을 설명해 주고, 딸기값과 귤값이 얼마나 올랐는지 계산하는 방법을 알려줬다. 집에 돌아와 식구들 저녁 밥상을 차려주고, 조용한 밤이 되면 야근을 하기 시작했다. 경제 용어를 함께 공부하기로 한 스터디 메이트님들에게 금리 변동과 물가지수에 대해 설명해 드릴 자료를 만들었다.
옆에서 남편이 피식 웃으며 한 마디 한다. “어딜 가나 숫자쟁이 삶은 여전하네.” 웃음이 나올만하다. 언제는 꼴도 보기 싫다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너밖에 없다며 밤낮으로 숫자를 손에 꼭 붙잡고 있으니 말이다. 내 인생을 관통하는 주제가 바로 ‘숫자’인가 보다 하고 요즘 들어 깨닫고 있다. 내가 선택하고 집중해야 할 원씽을 몰라보고 그동안 외면하고 방황하며 돌아다닌 게 참 부끄러웠다.
하지만 다시 만난 나의 원씽이 단지 익숙함 때문에 반가운 게 아니다. 최근에 다양한 분야에 새로운 시도를 한게 나의 약점을 보완할 수 있는 시간이 되어줬다. 아이들에게 수학 수업을 하면서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주는 나를 보게 된다. 아이들이 내 뜻과는 다르게 수업에 호응하지 않을 때는 아이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노력을 하게 된다. 1년 넘게 고전 필사를 하며 공자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긴 시간이 헛되지 않았다. 스터디 자료를 만들 때는 글 쓰는 일에 크게 시간을 들이지 않아도 뚝딱 글 한 편을 써 내려가게 된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연습하던 그 시간이 얼마나 유익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회사에서 나는 숫자 핸들링은 잘 하지만 보고서 쓰는 일에는 젬병인 직원으로 유명하지 않았던가? 과거의 나보다 한층 더 업그레이드되어 숫자와 재회하게 되니 이전보다 훨씬 더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됐다.
게다가 쉬는 동안 나는 천군마마 부럽지 않은 든든한 파트너를 여럿 만났다. 그동안 함께 마음 공부하고, 그림을 그리며 만난 온라인 메이트님들은 나의 경제 용어 스터디 준비에 얼마나 큰 힘이 되어줬는지 모른다. 아이디어 회의부터 프로젝트 네이밍과 홍보까지 마치 내 일처럼 함께 고민하고 애써줬다. 그 결과 풍요와 부의 기운을 담은 꽃 ‘모란’의 이미지를 반영한 ‘모란모란 피어나는 경제상식’이라는 멋진 프로젝트가 탄생했다. 꽃이 좋아서 플로리나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하던 이력이 경제 스터디와 연결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홍보 이미지에는 최근에 배운 디지털 드로잉 기술을 활용해서 직접 모란꽃 그림을 그려 넣었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모두 녹아들어 간 총집합체인 ‘모란모란’ 프로젝트를 아끼는 마음으로 갈고닦아서 나만의 브랜드로 만들어가고 싶다.
찬 바람이 부는 계절이면 늘 눈길이 가는 꽃이 있다. 사랑스러운 꽃잎들이 모여있는 게 꼭 요술 방망이를 연상시키는 히아신스다. 곧게 쭉 뻗은 줄기가 주는 느낌은 또 얼마나 싱그럽고 시원해 보이는지 모른다. 그 모습이 매력적이어서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뒤로 한걸음 물러나게 된다. 분명 좋은 향기를 풍기지만 너무 강하다. 좁은 집에 들여놨다가는 강한 꽃향기에 두통이 느껴질 것 같다. 그래서 히아신스를 한 번도 아직 사보지 못했다.
어쩌면 히아신스는 나와 닮은 꽃 같기도 하다. 강렬하게 숫자 냄새를 풍기던 나란 사람. 나는 그 강렬한 향을 좁은 방 안에만 가둬뒀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독한 향에 머리가 아파 진절머리가 났나 보다. 널찍한 정원에 히아신스를 가져다주면 바람이 솔솔 불 때마다 은은하게 꽃향기가 주변에 퍼져 참 좋을 텐데, 우리 집이 좁다는 게 늘 아쉬웠다. 이제는 집 밖으로 나와 활동 범위를 차츰 넓혀봐야겠다. 넓은 세상에서 좋은 향기를 전달하기 위해 오늘도 나만의 ‘단 하나’, 원씽을 탁월하게 갈고닦아야겠다.
당장 히아신스를 찾으러 꽃시장에 갈 순 없으니 그림이라도 그려본다. 히아신스는 색깔마다 꽃말이 다 다르다던데, 나는 꽃잎을 파란색으로 칠해주어야겠다. 파란색 히아신스의 꽃말은 ‘한결같은 사랑’이라고 한다. 꽃잎을 정성스럽게 색칠하면서 다짐해 본다. 돌고 돌아 다시 만난 만큼 나의 원씽을 더 아끼고 사랑해 주는 지조 있는 여자가 되어야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