샴페인으로 입술을 축인 후에 케이크를 치우고 소혜 여사가 수저를 드는 것을 신호로 본격적인 식사가 시작되었다.
“바이올린 작업은 잘 돼가니?”
네 남매 가운데 맏이인 은휘가 불쑥 물었다.
“그럭저럭이요.”
“그럭저럭이면 어떡하니. 어른들 거역해가면서 하는 거, 제대로 해야지.”
똑 부러지는 성향의 은휘가 한소리 했다. 라한의 의부 서명하와 소혜 여사는 라한이 집안 사업을 돕기를 바랐지만 라한은 그럴 뜻이 전혀 없었다. 현악기 만드는 일은 라한의 오랜 꿈이었다.
이 문제는 라한이 대학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했을 때 불거져 집안에 한 바탕 소란을 불러왔던 바 있었다. 라한이 현악기 제작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독일의 미텐발트로 떠나면서 표면적으로는 일단락 지어진 문제이기도 했다.
“잘 할 게다. 어려서부터 제 일은 알아서 잘 하는 아이 아니냐.”
중후한 음성이 라한을 두둔했다. 라한의 새아버지 명하였다.
“네, 아빠.”
은휘가 입을 다물었다. 기실 은휘가 원하는 것은 라한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잘, 기왕이면 아주 잘 해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라한이 서씨 일가의 사업인 골프장과 리조트 경영과는 끝까지 무관하기를 바랐다.
“은휘는 약속된 사람이 있으니 됐고, 은세는 두루두루 만나보고 있으니 그러다 보면은 연분을 만날 테고. 은성이하고 라한이는.”
“할머니, 저는 그냥…… 결혼 생각 같은 거 없어요.”
은성의 작은 몸이 더욱 작아 보이는 것은 그녀의 움츠러든 마음 때문일 것이다. 석란이 식탁 아래로 은성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은성이 결혼을 거부하는 것은 아마도 남들과 다른 몸 때문이리라. 그런 몸으로는 좋은 사람을 만나기 힘들 거라 단정 짓고, 가능성을 닫고, 미리 체념해 버림으로써 상처도 받지 않겠다는 방어적인 기제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나는 옛날 사람이다. 세상은 그저 남들 사는 대로 남들 다 하는 거 하면서 살아야 하는 법이라고 믿는 사람이야. 내가 앞으로 살면 얼마를 더 살겠니. 자손들 짝을 다 채워줘야 편히 눈을 감지. 아범하고 어멈도 앞으로는 강 건너 불구경 하듯 말고 신경들 좀 써라.”
몸이 남들과 같지 않은 은성도, 재가하여 들어온 며느리가 데려온 자식인 라한도, 소혜 여사에게는 한가지로 내 화단에 속한 내 소관의 화초였다. 은휘나 은세와 마찬가지로 물과 거름을 양껏 주어 가꾸었다.
이제 저마다의 가정이라는 꽃을 피워줄 차례라고, 남부럽지 않게 그럴듯한 꽃으로 피워 주어야 한다고. 그것이 자신이 마지막으로 다해야 할 소명이라고 소혜 여사는 믿었다.
“예, 어머니.”
명하와 석란이 고분고분히 대답했다.
‘할머니’ 하고 부르려는 은성을 석란이 눈짓으로 만류했다. 은성은 석란을 향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다물었다. 할머니를 꺾는 것은 불가능했다.
“할머니, 너무 그렇게 몰아치지 말아 주세요. 제가 장담하는데 할머니께선 틀림없이 백 세는 가뿐히 넘어 사실 테니까요.”
감히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건 은세뿐이었다. 덕분에 식탁을 둘러싼 공기가 한풀 눅어졌다. 애교스러운 막내랄 수는 없는 은세였지만 집안 분위기를 그나마 질식은 하지 않을 정도로 누그러뜨려 놓는 역할을 언제나 필요한 시점에 무심히 해내곤 했다.
“저런…… 버르장머리 없는 것. 노인네 놓고 건강 장담, 수명 장담하는 거 세상 어리석은 소리인 게야. 문 밖이 저승이라고 네 할미 오늘밤 당장 죽어도 이상할 것 없는 파파노인이다.”
혀를 차며 가볍게 흘겼지만 소혜 여사의 어조는 부드러웠다.
“어머니,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사위스런 말씀은 아예 마시라는 뜻으로 석란이 말했다.
“괜찮다. 사실이 그런 것을. 어서들 먹자.”
할머니와 새아버지는 피가 섞이지 않은 손자, 피가 섞이지 않은 아들을 조금도 달리 대하지 않았다. 속마음이 어떤지는 몰라도 그들은 라한을 포함한 네 아이에게 모든 면에서 공평하고 공정했다.
그러나 자로 잰 듯한 공평과 공정에서 라한은 외려 소외감을 느꼈었다. 또 은휘나 은세가 거기에서 모종의 박탈감 같은 것을 느끼고 있음도 라한은 눈치챘었다.
은성만이 예외였다. 은성은 석란과 라한을 매끄럽게 받아들였고, 할머니와 아버지의 공평과 공정에 마음을 다치지도 않았다. 은성은 장애를 가지고 살아오는 동안 저도 모르게 벼려진 예리한 감수성과 감지력으로 이내 짚어냈던 것이다.
아무도 비명을 지르지 않지만 실은 모두가 상처 입고 있다는 걸.
은성은 이쪽과 저쪽을 두루 포용하면서 가교가 되고자 애썼다. 예민한 정서가 닮아 있었던 은성과 라한은 오래지 않아 교감을 나누게 되었다.
저녁 식사에 이어진 후식 시간도 차분하게 흘러갔다. 모인 사람의 수에 비해 떠들썩하지는 않았지만 골프장 사업 관련 화제에서부터 소소한 추억담까지 부족하지 않을 만큼의 가족 담소가 이리저리 오고갔다.
서로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부대끼며 쌓아 온 세월 위에 구축된 나름대로 평화롭고 안정된 시간이었다. 이런 시간이 무의미한 건 아니라고 라한은 인정했다. 예전에는 이런 인위적인 화목함을 못 견뎌했었지만.
어쨌거나 아이들은 무탈하게 도담도담 자라 성년이 되었다. 이만하면 나쁘지 않은 가정이라고, 라한은 엄마의 얼굴에 서린 조용한 온기를 보며 긍정했다.
작약 꽃봉오리가 파라솔 펴지듯 투둑투둑 터져 피어나는 오월의 밤이라면, 누구라도 얼마쯤 너그러워져도 좋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