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란과 라한 모자가 단둘이 마주할 수 시간이 주어진 것은 밤이 꽤 깊어서였다. 정원의 소나무 아래 둥글넓적한 조경석에 앉은 석란의 곁으로 라한이 다가왔다. 기척을 느낀 석란이 나지막이 말을 건넸다.
“매일 밤 여기에서 안부를 전하곤 해. 맑은 밤엔 북극성, 흐린 밤엔 구름, 비 오면 비에게, 눈 오면 눈에게. 네 안부를 묻고 내 안부를 맡기고, 그렇게.”
하루도 빠짐없이.
“다들 착실하게 잘 전해 주던 걸요.”
어제도 어머니의 인사를 전해 준 북극성에게 되물었답니다. 제 어머니는 행복합니까?
“라한아, 엄마는…….”
계속해서 북극성에 눈길을 둔 채로 석란이 운을 뗐다. 행복하냐는 질문을 전해 듣기라도 한 것처럼.
“평온해. 그래, 평온해.”
스스로도 이제야 깨쳤다는 듯 석란은 읊조렸다. 라한의 친부 송유건과 함께였던 시절을 한 단어로 요약한다면 스릴이나 스펙터클 그런 쪽에 가까우리라.
다감하고 가정적인 남편이었던 유건은 롤러코스터와도 같은 운수를 타고난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손대는 사업마다 성공했고 성공한 후에는 또 반드시 불가항력의 악재를 만나 실패하곤 했다. 그에 따라 석란과 라한의 삶도 풍요와 극빈, 행복과 파란 사이를 되풀이 오르내렸던 것이다.
“평온…… 그거면 된 거예요? 정말 그걸로 충분해요?”
라한이 높임말을 쓰기 시작한 건 이 집에 들어오고부터였다. 동시에 호칭도 ‘엄마’에서 ‘어머니’로 바뀌었다.
“언뜻 쉬워 보일지 몰라도 평온이라는 거 그거, 누구나가 다 누릴 수 있는 거 아니잖아. 그리고 명하씨 저이,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은 좋은 사람이고, 좋은 가장이고.”
유건은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경영하던 인테리어 사업이 부도를 맞아 빚에 허덕이던 시점이었기에 사고를 자살로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석란은 그럴 리 없다고 확신했다.
라한에게도 누누이 말했다. 절대로 자살이 아니라고. 널 위해 소장하고 있던 진창현 컬렉션 바이올린만은 팔지 않았다는 건 곧 아빠가 포기하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네 아빠는 포기를 모르는 사람이었다고.
석란이 말한 진창현 컬렉션이란 미국 바이올린 제작자협회로부터 무감정 제작자(Master Maker)로 선정된 바 있는 재일교포 바이올린 명장 진창현이 만든 바이올린과 비올라와 첼로를 가리키는 이 가족만의 표현이었다. 그 중 바이올린은 석 대였고, 셋 중 두 대가 각각 스트라디바리우스 카피본과 과르네리 델 제수 카피본이었다.
유건이 바이올린 매니아랄까 하여튼 바이올린을 무척이나 좋아했는데 연주보다 바이올린이라는 악기 자체를 더 사랑했다는 게 특이점이라면 특이점이었다.
“엄만 더 바랄 거 없어. 아니, 아니다. 아직 딱 한 가지 아니아니 두 가지쯤의 소망이 남았구나.”
이제야 석란이 라한을 돌아보았다. 애정 담뿍한 눈웃음이 아직 곱다란, 실제 나이보다 한참 젊어 보여 얼핏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어머니의 얼굴이지만 라한만은 읽어낼 수 있다. 삶의 질곡이 그녀에게서 가져간 무엇과 남겨 놓은 무엇을.
“우리 아들 하고 싶은 일 열심히 해서 오르고 싶은 경지에 오르는 거, 좋은 상대 만나서 정답게 살아가는 거.”
“그 소망이 어머니 행복을 여는 열쇠가 될까요?”
“음, 그보다 더 확실한 열쇠는 없지. 노력해 줄 거야?”
라한이 모호하게 미소 지었다.
“그럼 집에 온 참에 누구 좀 보고 가련? 마침 얘기 들어온 자리가 있는데 엄마는 그 아가씨 괜찮더라.”
“제작 콩쿨 준비 때문에 시간 내기 어려워요. 죄송해요.”
현악기 제작자로서의 라한은 아직 완전한 무명이었다. 입지를 다져 나가려면 제작자 콩쿨 입상이 거의 필수였다.
“그렇구나. 그래, 우선순위라는 게 있으니까. 어쨌든 엄마는 네가 구김살 없이 쾌활하고 세상 물정에도 밝은 상대를 만났으면 좋겠는데, 엄마 욕심대로 다 되는 일은 아니겠지?”
석란이 웃었다. 라한은 엄마를 웃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노력해 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미텐발트 있을 때 한 번씩 작약 꽃을 샀어요. 어머니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향이 작약 향기거든요.”
“엄마가 예전부터 피오니 계열 향수를 좋아했기 때문일 거야. 혹시 너, 저 작약 화단이 언제부터 저기에 있었는지 아니?”
“우리가 이 집에 들어올 때부터 있었잖아요.”
그날도 이 정원은 은은하고 상쾌한 향기로 가득했다, 지금처럼. 온화하고 향긋했던 정원의 첫인상 때문에 얼핏 방심해서일까. 은휘와 은세의 냉담함에 당황했던 기억이 라한의 가슴에 생생하다. 정원은 봄이고 마음들은 겨울이었던, 겹으로 흐르던 계절의 기억.
“맞아. 근데 원래는 저기가 화단이 아니었대. 그냥 잔디가 깔려 있었는데 우리가 들어오기 직전에 작약 화단을 만들었다는구나.”
“할머니께서요?”
“그래, 할머니께서. 내가 작약 향기를 좋아하더라고 지나치듯이 말씀하시면서.”
소혜 여사다운 일처리라고 라한은 새삼 혀를 내두른다. 저토록 철저한 세심함이라니.
“할머니께서 직접 말씀하신 거예요?”
“아아니, 은세가.”
석란의 표정에서 즐겁고 흡족한 마음이 보였다.
“은세가 그런 소소한 얘기를 다 해요? 어머니한테?”
“요즘은 은세가 아닌 척하면서도 엄마를 꽤 챙긴단다. 너 미텐발트로 떠나면서부터 표 안 나게 조금씩 변했지, 아마.”
“그랬어요?”
은세가 철이 들었나 보다고, 고마운 일이라고, 라한은 끄덕였다.
시간에 따라 밝기가 조절되게끔 세팅되어 있는 정원의 조명이 한층 희미해졌다. 두 모자는 천천히 일어나 정원을 가로질러 걸었다. 세 빛깔의 작약 꽃들이 어스름 속에서 향기로운 얼굴을 흔들며 배웅했다.
*
이런 것이었나?
밤이 되어도 불이 밝혀지지 않는 건넛집을 보며 문비는 채선이모의 말씀을 이해할 듯했다. 밤에 불빛 건너다보이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그런 게 있잖니, 그 말씀.
앉아 있는 들마루 위로 펼쳐진 낙엽송의 가지가 낭창낭창 너울거렸다. 오월의 밤, 숲이 불어 보내는 바람이 선선하고 향기로워 또 엄마가 그립다. 엄마는 말한 적이 있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아는 법이라고.
그렇다면, 내 아버지라는 사람의 난 자리는 엄마에게 어떤 형상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