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쪽 집 사이의 개울 위로 높게 놓인 오래된 다리 옆에 노랗게 켜진 키 큰 외등은 쓸쓸함만 자아냈다. 외등에는 인기척이 묻어 있지 않으니까.
외등 뒤로 나 있는 공터에 세워 둔 차도 한 대만 덩그마니 있으니 왠지 허전해 보인다. 차를 서너 대쯤 세울 수 있는 공터는 두 집의 공용주차장인 셈이었다.
이렇게 나약한 인간이었던가. 쓴웃음이 나왔다. 누군가가 대답해 주면 좋겠다. 나약한 게 아니라고, 엄마를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럴 법하다고. 그립거나 외롭거나, 먹먹하거나 막막하거나, 그 모두이거나.
슬픔의 바닥까지 내려가 본 사람은 안다. 울음 이상의 울음이 있다는 것, 눈물 아닌 눈물이 있다는 것. 그래서 울음 아닌 울음이고, 눈물 이상의 눈물인 것,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그것들이야말로 가장 뜨겁게 아프다는 걸.
문비는 한참을 망부석처럼 앉아 있었다. 비 예보가 있어 별이 없는 밤이었다. 가는 빗방울이 듣기 시작하고서야 안으로 들어간 문비를 깊이 모를 헛헛함이 엄습했다. 두유를 두 팩이나 거푸 비웠다.
엄마가 있었을 때는 헛헛하다고 말하기가 무섭게 국숫물이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졌다. 오이 써는 소리가 도마 위에서 똑똑거리고 손으로 뜯은 상추가 국수 위로 우수수 푸르게 흩어지고.
마늘을 다져 넣고 빨간 초장을 떠 얹은 비빔국수를 엄마는 손으로 조물조물 비벼 예쁜 그릇에 담아 문비 앞에 내어 주곤 했었다. 참기름 몇 방울 떨어뜨리면 훨씬 더 맛있는데, 하면서.
문비는 비빔국수에 참기름 넣는 것을 싫어했다. 엄마는 참기름을 치는 대신 다진 마늘을 넣지 않는 쪽을 선호했다. 식성이 비슷한 듯 미묘하게 다른 모녀지간이었다.
희미한 빗소리에 몇 차례 설핏설핏 뒤척인 밤이었다. 그런 것치고는 가뿐하게 눈이 떠진 아침, 날은 개어 화창했다.
정오를 조금 지난 무렵 문비는 개울 옆의 산기슭을 따라 난 좁은 길, 길이라기에도 뭣한 비탈을 따라 산허리까지 올라갔다. 오늘의 목표 식물은 자생 철쭉. 간밤의 부슬비로 젖은 꽃과 가지가 마르기를 기다리느라 느지막이 채집에 나선 걸음이었다.
자생 철쭉의 꽃, 그 연하고 청초한 자태를 보면서 문비는 개꽃이라는 속칭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꽃을 두고 개꽃이라니.
남승효 교수는 일상적으로는 꼭 개꽃이라고 불렀다. 어릴 때부터 입에 붙은 이름이라 정겹다 했다. 먹어도 되는 진달래는 참꽃, 먹지 못하는 철쭉꽃은 개꽃. 친구들은 먹을 수 있는 참꽃을 더 좋아했지만 남교수는 어쩐지 개꽃에 더 끌렸다고 했다.
아마 따듯한 천성에서 우러난, 소외받는 것에 대한 연민이었을 거라고 문비는 짐작한다.
비탈길을 되짚어 내려와 시냇물을 건너 외등이 서 있는 곳까지 왔을 때 막 언덕길을 올라오는 청회색 SUV 승용차가 보였다. 라한의 차였다. 문비는 걸음을 멈추었다. 익숙한 인기척이 무심결에 반가웠던가? 기왕 눈에 띄었으니 인사나 나누자 싶었다.
“어? 은성 언니는요?”
혼자 차에서 내린 라한을 향해 문비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본가에 남았어요. 봐야 할 일이 좀 있어서.”
차 트렁크에서 짐들을 내리며 라한이 대답했다. 할머니의 명으로 기어이 맞선 자리에 나가게 된 은성이 내쉬던 한숨의 무게 때문에 라한의 마음도 편치는 않았다.
다만 라한은 할머니의 독단적인 방법에 동의하지 않는 것과는 별도로 좋은 사람을 만나 함께할 가능성을 완전히 닫아 버리는 은성의 태도는 지지할 수 없었다.
은성이 얼마나 아이를 좋아하는지, 아이가 있는 평화로운 가정을 꾸려가는 평범하고도 귀한 행복을 얼마나 동경해 왔는지 모르지 않기에. 은성이라면 그 어떤 누구보다 그러한 행복을 누려 마땅한 사람이라 굳게 믿고 있기에.
“깨금이는요?”
“한실댁 할머니께 맡겼는데 같이 밭에 나가셨다고 저녁때나 내일이나 편할 때 데리러 오라시네요.”
“아, 네에. 짐 옮기는 거 도와드릴까요?”
혼자서 한 번에 다 들기에는 벅찰 듯한 짐을 가리키며 문비가 다가섰다.
“그래요? 그럼 이것만 좀 부탁해요.”
라한이 내민 것은 두 개의 종이 쇼핑백이었다. 찍혀 있는 서점의 로고가 반가웠다. 문비가 머리를 식히러 자주 들르던 서점이었다. 슬쩍 들여다보니 맨 앞의 책 표지가 얼핏 보였다. 문비도 기다리고 있던 신간, 좋아하는 문학평론가의 새 산문집이었다.
라한은 양쪽에 손잡이가 달린 아이스박스를 들었다. 제법 무거워 보이는 검은 아이스박스에 무엇이 들어 있을지 추측하는 건 쉬웠다. 아마도 음식일 것이다. 챙겨 보낸 사람은 그의 어머니일 테고.
“혹시 점심 안 먹었으면 같이 먹을래요?”
마당을 지나 현관에 아이스박스를 내려놓고 쇼핑백을 건네받던 라한의 갑작스런 제안에 문비는 잠시 멍한 표정이 되었다.
“아, 점심, 점심이요?”
문비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점심때가 좀 지났다고 해야 할 시각이었다.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된 줄을 문비는 몰랐던 것이다.
“점심 아직이긴 한데…….”
오늘 아침, 어제 해서 남은 약간의 밥을 긁어 김치볶음밥을 만들어 먹으면서 문비가 정해 둔 점심 메뉴는 냉동만두였다. 전자레인지에 쪄서 간단히 한 끼 때울 작정이었다.
“아직이면 같이 먹죠. 어머니가 반찬을 이것저것 넣어 주셨거든요. 문비씨도 집 떠난 지 좀 됐으니 그리울 거 아니에요, 집밥.”
집밥……. 정성이 들어간 반찬이 그립기는 했다. 그래도 처음 접하는 남의 집 음식이니 입에 맞을지 어떨지 알 수 없다는 부담감이 있다. 잠시 망설인 끝에 문비는 일단 모험을 해 보자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네, 그럼 신세 좀 질게요.”
야트막한 돌층계로 된 언덕길을 나란히 걸어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