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돌아가셨어요, 몇 달 전에.”
꽃 진 자리에 조롱조롱 열린 연둣빛 살구가 바람에 살랑 흔들리는 걸 물끄러미 보던 문비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밑도 끝도 없는, 돌연하고도 사적인 고백.
가깝다고는 할 수 없는 타인에게 왜 이런 말을 해버렸는지 문비는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당황스러움보다 후련함이 컸다. 잘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잘 모르는 사람이면서 아주 모르는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실은 누구든 붙잡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슬픔에 깊이 빠지지 않고 엄마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문비는 깨달았다.
그게 아니라면, 푸른 잎사귀 사이사이로 보이는 하늘이 또 다른 푸름으로 너무 눈부셔서 그랬을지도 몰랐다. 기실 이유나 구실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꺼낸 이야기를 계속 이어 하고 싶었다.
“아, 네.”
라한은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어조로 차분하게 호응했다. 그의 눈에 여러 모습의 문비가 겹쳐졌다.
오슬로공항 카페에서 망연히 자기 안의 심연을 들여다보고 있던 그녀, 흐드러진 살구꽃의 환함조차 닿지 못 할 어둠을 안고 저기 저 자리에 앉아 있던 그녀, 저물녘 큰길가에서 목례하고 돌아서던 그녀의 야윈 듯 꼿꼿하던 뒷모습.
그날, 오래 외로움을 견뎌 온 사람의 강단 같은 것이 배어 있는 그녀의 등을 그는 몇 번이고 돌아보았었던가. 그녀가 모롱이를 돌아 사라지고 난 뒤에도.
“그런데 유언이랄지 마지막 당부랄지 그런 걸 좀 희한한 걸 남기셨어요.”
문비의 말은 불규칙하게 띄엄띄엄 그리고 나직나직 흘러나왔다. 라한은 위로도 연민도 띠지 않고 심상하게 듣고만 있었다.
“장례식을 하지 말래요. 대신 여행을 가라는 거예요. 글쎄 따로 만들어 뒀던 여행자금까지 쥐어주시면서, 가능한 한 길게 가능한 한 많은 곳을 다니다 오라는 거예요.”
아아 그래서 오슬로공항에 그런 표정으로 앉아 있었구나. 여행의 형식을 띤 장례를 치르는 사람의 표정이었구나. 라한은 그날의 그녀를 이해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잖아요. 그렇죠? 이상하죠?”
먼 곳에 두었던 눈길을 라한에게 고정하고 문비가 물었다.
“평범한 상황이 아니긴 하네요.”
라한은 유보적인 뉘앙스로 대답했다. 물을 때의 문비의 어조가 마치 꼭 이상하다고 답해 달라는 것처럼, 동의를 요구하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하지만 라한의 입장에서는 선뜻 이상하다고 말해 버리는 것도 적절치 않다 여겨졌다.
“이상한 거죠. 이상한 거예요. 사람이 감이라는 게 있잖아요. 감이 아무래도 이상하거든요. 엄마는 제 유일한 가족이었고 가장 가까운 친구였어요. 우리는 소울메이트라고 할 만한 모녀지간이었어요. 근데 엄마가 돌아가시고부터, 아니, 돌아가시기 얼마 전부터 뭔가 좀 보이지 않는 틈이랄지, 엄마가 내가 알던 엄마가 아닌 것 같은 순간이 문득문득 있었어요.”
내가 알던 엄마가 아닌 엄마, 거기에 무언가가 있을 것만 같은 기분. 그 무슨 두렵고 치명적인 진실 같은 것이 도사리고 있을 것만 같은 기분. 모른 척 덮어 두고도 싶고 맹렬히 알아내고도 싶은.
이런 기분을 혼자 간직하고 있는 게 버겁고 찜찜했는지도 몰랐다. 문비는 어느 정도 홀가분한 심경이 되어 이만 입을 다물었다.
라한은 신중한 빛을 띤 채 시선은 먼 풍경에 두고 있었다. 문비는 그게 마음에 들었다. 경청하는 사람의 얼굴, 그러나 불필요한 호기심이나 첨언은 엿보이지 않는 얼굴. 사려 깊은 사람의 얼굴이었다.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
다 큰 남자가 ‘아빠’라고 부르는 것이 어떻게 들릴까 싶어 라한은 잠시 멋쩍은 표정으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이었다.
“저는 열한 살이었고 까닭 모르게 자꾸 혼란스럽고 화가 나는데, 가뜩이나 슬프고 힘든 어머니를 더 힘들게 하기는 또 싫고. 그러니 내색은 못 하겠는데 감당은 또 안 되고…….”
무방비하게 듣고 있던 문비가 ‘아!’하는 표정을 지었다. 좀 전에 거실에서 본 가족사진 탓이었다. 할머니와 부모님과 사남매, 사진 속 일가족은 온전했다. 그런데 저 사람, 열한 살에 아빠를 잃었다고? 그렇다면…….
“은성 누나가 서은성인 걸 모르고 있었나 봐요?”
“그냥 은성이라고만 하셔서…….”
라한이 송라한이라고 했으니 당연히 송은성이려니 했던 것이다. 그게 무슨 대수냐는 뜻으로 문비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어찌된 사정인지 알았으니 굳이 설명할 필요 없다는 신호였다.
“그 열한 살 아이는 감당 안 되는 혼란과 화를 어떻게 삭였는데요?”
화제를 다시 되돌리면서 문비는 납득했다. 그래서 아빠라고 했구나, 열한 살에 멈춰 있는 호칭이라서.
“못 삭였어요. 툭하면 주먹다짐을 하고 다녀서 슬픈 어머니를 더 슬프게 만들고 말았죠.”
“아이였으니까요.”
뜻하지 않게 아빠를 잃은 아이. 죽음을 이해하기에도, 갑작스러운 아빠의 부재를 받아들이기에도, 아직은 어린.
“하루는 또 싸우고 들어온 저를 어머니가 끌고 무작정 집 밖으로 나가셨어요. 정신을 차려 보니 합기도장이더군요. 제 이름으로 바로 등록을 한 어머니는 관장님께 부탁했죠. 우리 애를 지금 당장 대련을 시켜 달라고, 실력이 아주 뛰어난 아이를 붙여 달라고 말이에요.”
라한의 어머니인 석란의 태도가 너무도 강경하고, 라한의 기세가 하도 살벌해서 합기도장 관장은 라한이 이미 격투기 학원깨나 다닌 아이인가 싶어 석란의 부탁을 들어 주었다.
“흠씬 두들겨 맞았겠네요.”
“왜 아니겠어요. 정신 번쩍 나게 맞았죠. 그런데 왠지 아프다는 느낌이 안 들었어요. 오히려 시원했다고 할까요.”
일방적으로 얻어맞으면서도 라한은 끈질기게 달려들었고, 중지시키려는 관장을 석란은 엄중한 간절함으로 막아섰더랬다.
“그러고선 합기도장 열심히 나갔죠? 더 이상 싸움 같은 거 하고 다니지도 않고.”
그 어머니는 아이의 가슴 속에서 쇳물처럼 들끓던, 대상조차 막연한 원망과 의문들을 제련하여 배출할 통로를 찾아 준 것이다.
“네, 그랬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