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하고 유려한

by 화진


바람이 일으키는 초록의 파도가 산꼭대기에서부터 밀려와 숲을 지나고 내를 건너 언덕을 타고 올라와 두 사람을 지나갔다. 문비의 단발머리를 부드럽게 흩뜨려 놓고.


문비는 버릇처럼 손가락빗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무심하고 유려한 동작. 라한은 그녀의 그런 동작을 보는 게 좋았다. 그 사실을 자각하자 어쩐지 상기되는 느낌이어서 라한은 별채 작업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때마침 문비의 에코백 안에서 진동음이 났다. 휴대 전화를 꺼내느라 문비는 그의 은밀한 즐거움도 쑥스러움도 알아채지 못했다. 액정 화면을 들여다본 문비는 눈을 가늘게 떴다가 스마트폰을 테이블 위에 엎었다.


“스팸 전화 같아요. 지역번호가 낯설어.”


“몇 번인데요, 지역번호가?”


“공육사.”


“제주도네요.”


“그래요? 제주도에 아는 사람이라고는 없으니 스팸이 확실하네요.”


문비가 에코백과 버킷햇을 들고 일어섰다. 신문지에 싸서 스케치북에 끼워 놓은 철쭉 표본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표본 전용 건조기가 없다. 어서 빨리 야책에다 옮기고 무거운 것으로 눌러 압착시켜야 상태 양호한 건조 표본을 얻을 수 있을 터였다.


“덕분에 점심 너무 잘 먹었어요. 똑같이는 못 갚을 일이고, 기회 되면 다른 쪽으로 보답할 게요.”


“그냥 숟가락 하나 더 놓았을 뿐인데요 뭐. 신경 쓸 것 없어요.”


함께 걸으며 라한이 대답했다. 그는 작업실로 가는 길이었다. 별채의 작업실 출입문과 마당의 입구가 같은 방향이었다.


두 사람은 마당 끝에서 목례하고 헤어졌다.


작업실로 들어선 라한을 친숙한 나무 내음이 먼저 반겼다.


라한은 무슨 의식인 듯 작업실 전체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보관 중인 가문비와 단풍나무, 적어도 10년 이상은 건조시킨 목재들을 천천히 살폈다. 만들어 놓은 현악기들을 만져 보거나 현을 가볍게 퉁겨 보거나 했다. 주로 바이올린이지만 비올라와 첼로도 더러 섞여 있다.


작업대 위에는 바이올린 스크롤을 깎기 위한 단풍나무 도막이 얹혀 있었다. 현악기제작 콩쿨 중에는 제출한 악기와는 별도로 또 열두 시간에 걸쳐 스크롤 깎기 실기 테스트를 보는 대회도 있었다. 그래서 라한은 스크롤 깎는 작업은 가급적이면 시간을 정해서 한 번에 끝내는 식으로 했다.


나무 도막을 손으로 쓸어 보던 라한이 작업대에서 물러났다. 어제 오후와 오늘 오전, 꼬박 하루치의 작업을 쉬었다. 연주가 필요했다. 바이올린과 활을 들고 현과 소리를 직접 느껴 보는 건 때로 작업에의 몰입을 이끌어내는 좋은 마중물이었다.


무의식적으로 라한이 택한 곡은 프랑크 바이올린 소나타. 본디 오르가니스트인 세자르 프랑크가 작곡가로서 인정받게 된 곡인 동시에 친구인 외젠 이자이의 결혼 선물로 연주되었다고 알려진 곡이다.


바이올린의 선율은 우아하면서도 생기발랄하게 흘렀다. 1악장이 끝났을 때 라한은 바이올린을 내려놓았다. 오늘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라한은 작업대에 앉아 단풍나무와 대패를 잡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


며칠이 지나도록 은성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사이 문비는 건너편 마당에서 노는 깨금이와 몇 번 인사를 나누었다. 깨금이는 반가움을 담은 낮고 멀리 가는 소리로 컹 짖었고, 문비는 이쪽 언덕과 저쪽 언덕 사이에 계곡과 공간이 있음에 안심하고 손인사로 알은체를 해주었다.


그러면 깨금이는 예의 그 순한 웃음을 지으면서 황금빛 꼬리를 설렁설렁 흔들었는데, 보고 또 보고 하다 보니 그 모습이 꼭 응원의 제스처 같았다. 누군가가 깃발을 흔들면서 보내주는 응원. 살아 있음에 대한 응원. 조건 없이 순수하고 따스한.


라한과도 한 번 마주쳤다. 귀에 익숙한 오토바이 소리에 혹시 우편물이 왔나 싶어 마당으로 나온 문비를 집배원 아저씨가 손짓하여 불렀다. 그때 라한은 택배물을 막 건네받던 참이었고, 그와 집배원 아저씨는 양쪽 집 사이의 계곡을 흘러가는 개천 위에 놓인 오래된 다리 옆에 서 있었다.


나이 지긋한 집배원 아저씨는 이 마을을 담당한 지 십 년도 더 되었다. 문비는 그보다 훨씬 전부터 매년 여름이나 겨울이면 이곳에 와 한동안 지내다 가곤 했으므로 집배원 아저씨와 문비도 꽤 오래 알고 지내 온 셈이었다.


집배원 아저씨는 ‘국제우편물인데.’ 하면서 문비에게 자그마한 소포를 내밀었다. 그러고는 반가운 표정으로 ‘인우가 보낸 거 맞지?’ 하고 덧붙였다. 그는 인우와도 안면이 있었고, 지금 문비가 묵고 있는 별장이 인우의 부모님 소유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산골 마을의 집배원이란 단순한 집배원이 아니었다. 노인들의 말벗이 되어 주기도 하고, 공과금이나 간단한 물품 구매 심부름까지 도맡아 하는, 반쯤은 마을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 보니 집집의 사정에도 밝기 마련이었다.


과연 인우가 보낸 소포였다. 바라보는 라한의 눈빛에서 약간의 궁금증이 읽혔고, 그래서 문비 쪽에서 먼저 로마에 음악 공부하러 가 있는 친구라고, 질문 없는 대답을 했다.


집에 올라와 개봉한 소포에서는 세 종류의 수제 허브솔트가 나왔다. 짧은 메모도 동봉되어 있었다. 절친한 이탈리아인 친구의 어머니께서 직접 만드신 거라고. 각각 장미, 로즈마리, 레몬바질로 만든 거라고. 장미로 만든 건 단 것에 소량 곁들이면 특히 좋다고.


음식 만들기를 즐기지 않는 문비였기에 ‘귀한 소금이 임자 잘못 만나서 개발의 편자, 돼지 목의 진주가 되게 생겼음. 하지만 매우 고마움.’ 이라고 인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저께 낮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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