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옅게 흐린 봄날. 햇살은 없지만 어둡지도 않은 저녁 빛 속에 대문간을 서성이는 누군가가 있었다. 단정하게 틀어 올린 머리채에 희끗한 가닥이 섞이고 눈가에는 잔주름이 졌지만 우아하고 늘씬한 미인이었다.
“어머니!”
은성이 차창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불렀다. 대문간의 그녀가 반색하여 손을 흔들었다. 연보랏빛 숄이 아지랑이처럼 휘날렸다. 운전대를 잡은 라한의 얼굴에도 고요한 화색이 깃들었다.
“또 한참 나와 계셨죠?”
차에서 내린 은성이 석란의 팔짱을 끼었다.
“바람도 쐴 겸해서.”
은성의 팔을 다정히 쓸며 눈을 맞추고 나서야 비로소 석란의 시선이 라한에게로 향했다. 은성을 볼 때와는 또 다른 애틋함이 석란의 눈에서 진하게 일렁였다.
라한은 싱긋 웃어 보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석란은 말없이 끄덕였다. 산뜻한 눈매와 오뚝한 코가 쏙 빼닮은, 굳이 말이 필요치 않은 두 모자였다.
“깨금이는?”
대문 쪽으로 돌아서던 석란이 멈칫하여 은성을 돌아보았다.
“거기 한실댁 할머니라고 믿을 만한 분한테 부탁드리고 왔어요. 깨금이, 좁은 차 안에 갇혀 있는 거 별로 안 좋아하잖아요. 오래 머물 것도 아니고 내일 바로 갈 거니까요.”
“그랬구나. 어서들 들어가자. 할머니 정원에 계셔. 화단 손질하신다고 나오셨지만 실은 너희들 기다려져서 나와 계시는 거야.”
대문을 지나 정원으로 들어서면서 라한은 할머니의 화단을 떠올렸다. 지금쯤이면 작약이 피기 시작했을 것이다. 새하얀 미스아메리카작약과 연분홍 사라베르나르작약 그리고 산호색의 코랄선셋작약은 해마다 이 집 정원의 오월을 풍미하는 주인공들이었다.
가드닝을 취미로 가진 할머니의 화단에는 다른 사람은 누구도 손 댈 수 없었다. 하나에서 열까지 당신께서 손수, 한 점 빈틈없이 가꾸시는 화단. 할머니는 당신의 가정도 그렇게 번듯하고 반듯하게 건사해 오신 분이었다.
‘과연?’
입모양만으로 은성이 라한에게 속삭였다. 과연 할머니가 우리를 기다리셨을까, 하는 뜻이었다. 라한은 자신도 모르겠다는 뜻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두 사람에게 할머니는 잔정이 넘치는 분은 아니었기에.
“할머니, 저희 왔어요. 건강히 잘 계셨죠?”
석란과는 스스럼없이 스킨십을 주고받던 은성이 할머니 앞에서는 예의바르게 굴었다.
“오냐. 은성이는 안색이 집에 있을 때보다 한결 밝고 좋구나.”
동글게 맺힌 꽃봉오리들 사이에서 팔순 넘은 김소혜 여사가 흙 묻은 면장갑을 벗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창이 넓고 리본이 묶인 플로피햇을 벗어 면남방과 면바지를 툭툭 털어냈다. 화단 일을 했는데도 방금 갈아입고 나온 듯 깨끗하기만 했다.
언제 어디에서도 흠 잡을 데라고는 없는 사람, 항상 스스로를 살피고 단속하여 무결함을 유지하는 사람. 은성과 라한의 눈에 비친 할머니는 그런 분이었다. 그래서 늘 어려웠다.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할머니?”
“그래. 라한이 먼 길 운전해서 온다고 피곤하겠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깍듯한 정답을 말하면서 라한은 얼마간 갑갑하다. 집에 왔다는 실감이었다. 은성이 동감한다는 듯이 등 뒤로 손을 뻗어 라한의 등을 다독였다.
“나는 잡초 뽑던 거 마저 마무리하고 들어갈 테니 너희들 먼저 들어가거라.”
소혜 여사는 플로피햇을 다시 쓰고 동글동글 아이스크림 같은 꽃봉오리가 맺힌 작약들 사이로 들어갔다. 다른 세 사람은 널찍한 정원을 가로질러 집 안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이야, 작은언니. 집에 통 안 오는 걸 보면 거기서 재미가 좋은 모양이지?”
거실 소파에 드러누워 태블릿을 들여다보던 은세가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
“어, 거기 참 좋아. 놀러 한 번 오라니까 안 오고. 은세, 어떻게 지냈니? 저번 그 사람하고는 잘 만나고 있고?”
늘 그렇듯이 은세는 심드렁하고 은성은 상냥했다.
“끝난 지 오래. 나의 욕망이랄까 그런 쪽을 전혀 자극하지 못하는 남자였거든.”
은세가 이제야 라한을 힐긋 보며 알은체했다.
“어서 와라, 송라한.”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은세는 태블릿으로 눈을 돌렸다.
“여전하구나, 서은세.”
여전히 처음 보았던 그때 같다. 십 년을 훌쩍 웃도는 세월에도 정말이지 한결같은 은세였다. 갑자기 가족이라는 명분에 묶여 이 집에서 첫 대면을 했던 중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꺼리지도 않지만 친밀하지도 않은 저 태도.
은세와 라한은 같은 나이였고 같은 중학교에 다녔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중학교 시절 친구들은 두 사람이 재혼 가정의 한 가족인 것을 모른다. 은세가 원했고 라한에게 함구해 달라고 강경하게 요구했기 때문이다. 라한의 심경 또한 굳이 알리고 싶지 않은 쪽이었고.
기다란 식탁에 풍미 좋은 음식이 차려지고 온 식구가 둘러앉았다. 상석의 소혜 여사 앞에 커다란 케이크가 놓였다. 여든세 번째 생일이지만 초는 하나만 꽂혀 있다. 소혜 여사는 일찍이 환갑상을 받았을 때 공표했었다. 다음 생일부터는 케이크에 초를 하나만 밝히겠다고.
석란이 초에 불을 붙이는 것을 신호로 다 같이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모두가 자기 역할에 충실하고, 여느 단란한 가정과 다를 바 없는 장면이다. 소혜 여사가 빈틈없이 가꾸는 화단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