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물녘

by 화진


문비는 책을 즐겨 읽었다. 아침에는 전공 관련 서적이나 인문서를 보고, 그림 작업을 하다 쉴 때나 밤 시간대에는 주로 소설이나 에세이에 손이 갔다.


책을 마저 다 읽었을 때는 해가 어지간히 기울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문비는 물을 한 잔 마시고 현관으로 향했다. 나가서 좀 걸을 작정이었다. 봄날 늦은 오후. 걷기 좋은 시절, 걷기 좋은 날씨. 이런 건 아낄수록 손해니까.


산기슭을 따라 비스듬히 경사진 도로를 타박타박 걸으면서도 문비는 의문을 완전히 놓지 못했다. 엄마에 대한 의문이었다. 기실 별것 아니라고 생각해 버리면 또 별것 아닌 일인데 좀체 놓아지지 않는 것을 보면 또 별것인 것도 같은, 그런 의문.


별스러웠던 유언도 유언이지만 곰곰 돌이켜보면 마지막 몇 달 동안 엄마에게서 석연찮은 기색이 엿보였던 적이 제법 있었던 것 같다. 대략 후회나 두려움, 망설임, 무력감 그런 유의 감정이 배어나는 듯했던 기억이다.


그때는 그저 당신의 병환 때문에, 죽음이 머지않았다는 절박함 때문에 그런 거라고 여겼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랐다. 그 석연찮음이 문비 자신을 향한 것이라는 추정이 의문과 뒤섞인 채로 마음자리 어디쯤에서, 끓고 있는 압력솥의 추처럼 자꾸만 달그락거렸다.


하고 싶은 말이 있었던 게 아닐까? 꼭 해야 할 말이면서 결코 할 수 없는, 그런 어떤 말.


꼬리에 꼬리를 물던 문비의 연상은 여기에서 그쳤다. 저만치 모롱이를 돌아 모습을 드러내는 누군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깨금이와 라한이었다. 반가움을 표시하려는 깨금이의 행동에 문비는 굳어 버렸고 그 순간 라한이 ‘엎드려’라는 말로 깨금이를 저지했다. 깨금이는 즉시 얌전히 제자리에 엎드렸다.


석양에 비친 부드러운 털이 황금빛으로 반짝이고, 잘 익은 머루포도처럼 맑고 깊은 두 눈이 문비를 올려다보았다. 무고한 생명의 순연한 눈이었다. 개의 표정에서 보이는 풀 죽은 서글픈 빛이 문비를 미안하게 만들었다.


“미안. 네 잘못이 아니야.”


깨금이에게 말한 문비가 라한을 향해 덧붙였다.


“개도 표정을 짓는다는 걸, 개도 낯빛으로 마음을 드러낼 줄 안다는 걸, 오늘에야 알았어요.”


“네. 얘들도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인상도 쓰고 어떨 땐 의뭉스러운 표정도 지어요. 물론 개체마다 차이는 있을 텐데, 우리 깨금이는 특히 감정과 표정이 풍부한 아이예요.”


사이에 나 있는 열 걸음쯤의 간격을 둘의 목소리가 고즈넉이 건너다녔다.


“문비씨는 언제부터 개를 무서워했어요? 계기가 있었나요?”


“계기 같은 건 없어요. 그냥…… 괜스레 겁이 나더라고요. 근데 깨금이는 모든 사람을 다 저렇게 좋아하고 반기나요?”


“그럴 리가요. 우리 깨금이도 나름의 안목과 취향은 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거들떠도 안 봐요.”


라한이 깨금이의 목을 다정히 긁어 주면서 동의를 구하는 눈짓을 하자 깨금이가 씩 웃었다.


“그럼 전 깨금이 마음에 들었단 거네요?”


깨금이가 먼저 살갑게 다가가는 사람들은 알고 보면 아픔이나 슬픔을 감추고 있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여 은성은 깨금이가 슬픔의 냄새까지 맡을 줄 아는 개라고 믿고 있었다. 라한은 문비에게 굳이 이런 자세한 설명까지는 하지 않고 간단히 대답했다.


“그런 거죠.”


“깨금아. 어쨌거나 고마워. 나를 마음에 들어 해줘서.”


깨금이가 고개를 들고 꼬리를 설렁 흔들었다. 마치 ‘천만에요’라고 대답하는 것처럼.


“혹시 문비씨, 개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 무서운 거 아닐까요?”


조심스러운 어조였다.


“모르겠어요. 그럴지도요.”


유순한 동물이구나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한 걸음도 다가서지 못하는 스스로를 조금 바보 같다고 느끼던 문비가 어렴풋이 웃음기를 띠었다.


“잘 돼가나요? 바이올린 작업…….”


바흐의 샤콘 이후로 라한의 바이올린 소리는 다시 들려오지 않았다. 문비가 놓친 것인지 그가 연주하지 않은 것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글쎄요. 그게…… 완성해서 소리를 내 보기 전에는 알 수 없으니까요.”


“아, 그렇겠네요.”


바이올린을 연주하지 않는 건 작업이 잘 진행되고 있어서일까 그 반대일까, 바이올린 소리가 들리지 않는 사이 잠깐 궁금했던 적이 있었는데. 방금 들은 말로는 가늠이 되지 않는다. 문비의 고개가 무심결에 갸우듬 기울었다.


“그림 작업은 어때요?”


“그냥저냥 순조로운 편이에요.”


“더 걷다 들어가실 거죠?”


“네.”


깨금이의 목줄을 짧게 잡은 라한이 가장자리로 최대한 멀리 비켜나 주었다. 깨금이에게 ‘앉아’와 ‘기다려’를 시킨 라한이 깨금이 옆에 한쪽 무릎을 굽혀 엉거주춤 앉더니 한 팔로 깨금이의 어깨를 둘러 안았다. 마치 어깨동무를 한 것 같은 자세였다.


종의 다름을 초월하여 둘은 친밀하고 편안했다. 라한이 깨금이의 순하게 늘어진 귀에다 무어라고 속삭였다.


“저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무슨 말을 한 거예요, 깨금이한테?”


도로 저쪽 가장자리로 멀찍이 지나가던 문비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아, 별건 아닌데…….”


라한이 머뭇거리는 동안 문비는 꼼짝 않고 서서 기다렸다. 사이의 간격은 도로의 폭 때문에 아까보다 조금 줄어 예닐곱 걸음 정도였다. 라한은 문비에게서 호기심과 더불어 신뢰를 느낄 수 있었다.


깨금이가 위험한 존재가 아니라는 신뢰, 만약의 경우에는 라한이 깨금이를 충분히 통제할 수 있으리라는 신뢰였다. 아까의 열 걸음에서 지금의 예닐곱 걸음, 미미하나마 도약이라면 도약일 것이다. 깨금이를 향한 문비의.


“저 언니가 낯가림을 하니 깨금이가 이해해 달라고, 천천히 조금씩 친해지는 게 좋겠다고 말해준 거예요.”


문비는 옅은 웃음과 함께 목례를 하고 발걸음을 뗐다. 깨금이가 알아듣는지 못 알아듣는지는 상관없는 문제일 터였다. 중요한 건 개의 마음까지 헤아리려는 사람의 태도였다. 저런 사람이라면 분명 언젠가 정말로 좋은 악기를 만들어낼 수 있을 거라고 문비는 생각했다.


그럼 그 악기는 좋은 연주자를 만나겠지. 그 연주자는 그 악기로 마음을 두드리고 어루만지는 연주를 하겠지.


해는 서산을 넘어가고 땅거미는 내리기 전이었다. 숲 냄새가 한층 가깝게 다가서고 노을은 냇물을 따라 흘렀다. 미풍은 뺨에 쾌적하고 머리 위 하늘은 청보라색으로 맑았다.


이러한 모든 아름다움을 나누던 엄마가 세상에 없다는 설움이 와락 솟구쳤다. 한편 엄마가 없어도 이 모든 아름다움이 여전히 단단하게 세상을 떠받치고 있다는 사실이 위안도 되었다.


산새들의 지저귐은 서글프다고도 들리고 괜찮다고도 들리고. 슬픔과 위안이 뒤섞이고 겹쳐지는 저물녘이었다. 삶이란 결국 이런 저물녘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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