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빛도 밝히지 못하는 - 2

by 화진


스케치에 색깔을 입히던 문비가 색연필을 놓고 기지개를 켰다. 청매화와 닮은 듯 다른 오얏꽃이 미색 종이에 이제 반쯤 피어났다.


서랍을 연 문비가 폴라로이드 사진 한 장을 꺼내 봄날 하오의 환한 빛 속에서 오래 들여다본다. 꽃이 흐드러진 오얏나무는 연초록 배경 안에서 홀로 뭉게구름처럼 희었다.


위잉위잉. 진동음이 들렸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문비가 뒤편의 안락의자 위에 놓인 휴대전화를 찾아냈다.


“어떻게 지내니? 밥은 잘 챙겨 먹고? 그림은 잘 되니? 아, 원두 보낸 거 잘 받았지?”


생각나는 말들을 한꺼번에 주르륵 풀어 놓고 시작하는 화법. 채선이모의 버릇이었다.


“네 잘 지내고요, 먹을 만큼 먹고 있고요, 그림 열심히 그리고요, 원두 보내신 거 잘 받아서 잘 내려 마시고 있어요.”


문비가 채선이모를 따라서 대답을 죽죽 이어 늘어놓으면 한마디 한마디가 끝날 때마다 일일이 으흠 하는 추임새를 넣는 버릇도 여전했다. 채선의 추임새는 언제나 콧노래처럼 경쾌하여 듣는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데가 있었다.


“오늘은 무얼 그리고 있었니? 잠깐, 이모가 알아맞혀 볼게. 어디…… 아, 맞다. 꼬약. 꼬약꽃! 맞니?”


채선은 남편인 남교수가 오얏을 꼭 꼬약이라는 사투리로 부르는 걸 놀려먹다가 어느 결엔가 물이 들어 버렸다.


“네, 오얏꽃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초능력 천리안으로 봤지.”


실은 어제 남교수와 문비의 안부를 염려하다 지금이 꼬약꽃이 한창일 때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말하는 대신 채선은 곧잘 하는 싱거운 소리를 했다. 채선의 이런 면을 문비가 좋아하기 때문이다.


“어쩐지 알 수 없는 시선이 느껴져 뒤통수가 뜨겁더라니 이모의 천리안 때문이었네요.”


장단을 맞춰 싱거운 소리를 하는 건 ‘저 괜찮으니 너무 걱정 마세요’의 뜻이었다. 채선이 하하 웃었다.


“이웃들하고도 잘 지내고?”


이웃들이란 은성과 라한을 일컫는 말이었다. 채선과 그녀의 가족들은 은성과 라한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은성 남매가 이사 온 지는 반 년쯤 되었고, 채선 일가가 별장에 다녀간 지는 벌써 이 년 가까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채선 일가가 별장 출입을 하지 않은 기간은 정인이 암을 진단 받고 투병 생활을 한 기간과 얼추 맞아떨어졌다.


“아직 얘기 나눠 본 건 한 번 뿐이지만 괜찮은 사람들 같아요.”


“나는 얘, 솔직히 너 거기 혼자 두기 뭐해서 내가 일주일의 반은 거기로 반은 여기로 왔다 갔다 그래야 하나 어쩌나 그 궁리도 했었다. 워낙 사람 사는 집이 드문드문한 동네잖니. 근데 바로 앞집에 젊은이들이 들어와 산다고 하니 얼마나 좋아. 밤에 불빛 건너다보이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그런 게 있잖니, 사람이.”


문비는 모르는 사실이지만 채선은 진즉에 동네 할머니들 중 한실댁 할머니에게 슬쩍 전화해서 은성과 라한의 평판을 물었다. 조용하고 참한 젊은이들이라는 한실댁의 말에 채선은 그렇다면 잘된 일이라고 마음을 좀 놓았던 것이다.


“네, 이모. 하지만 전 앞집에 누가 이사 오지 않았어도 아무렇지도 않았을 걸요. 정말이지 제 걱정은 마세요.”


정인이 문비를 온실의 화초로 길러내지는 않았다는 것, 문비가 독립적인 성격이라는 것은 채선도 익히 알고 있었지만.


“너는 그렇게 괜찮다고 하고, 나는 이렇게 걱정하고. 원래 다 그런 거지 뭐.”


그러니까, 채선의 걱정은 애정의 다른 얼굴이었다. 문비의 ‘괜찮아’ 역시도.


“우리 인우, 연락 자주 오니?”


이탈리아의 산타체칠리아 국립음악원에서 성악을 공부하는 인우는 채선과 남교수 사이의 둘째 아들로 문비와는 동갑내기 친구였다. 유치원에서 중학교까지 함께 나온.


“자주 오는 편이에요.”


“녀석 잘 지낸다니? 한 번 물어보렴. 혹시 병이라도 난 건 아닌지. 부모한테 안부 전화 하면 죽는 병 그런 거 말이야.”


“그 말씀 토씨하나 안 빠트리고 고대-로 인우한테 전할 게요. 저어…… 그런데요 이모.”


“어, 왜? 뭐 필요한 거 있어? 뭐든 말만 해.”


“엄마가 왜 저한테 여행을 가라는 유언을 남겼는지 이모는 혹시 아시나 해서요. 암만 생각해도 너무 뜬금없잖아요.”


이상하게 두고두고 신경이 쓰였다. 그 말을 하던 엄마의 묵직한 진지함이, 왜 하필 여행이냐고 되물을 수조차 없게 만들던 착잡하고 간절한 눈빛이.


“글쎄다. 널 바쁘게도 만들고 주의도 환기시켜서 네가 슬픔 속에 주저앉아 있을 수 없게 만들겠다는 의도 아니었을까?”


그럴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닐지도 몰랐다. 채선이모도 까닭을 모른다는 것만 확인했다.


“그럼 이모 혹시…… 제 엄마랑 아버지 이혼하신 까닭은 아세요?”


문비의 출생신고를 하자마자 이혼 절차에 들어갔다는 얘기는 언젠가 오래 전에 외할머니가 지나가는 말씀으로 하시는 걸 들은 일이 있었다.


“아니. 슬쩍 물어본 적은 있는데 그냥 그렇게 됐다고만 하더라. 그렇게 나오니까 다시 물을 수가 없었지.”


그저 얼굴만 아는 정도의 고교 동창이었던 채선과 정인이 나중에 우연히 재회하여 친해지는 계기가 된 건 인우와 문비가 다닌 유치원의 학부모 참관 수업이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 문비는 색연필을 다시 잡지 않았다. 집중이 흐트러졌다고 해야 할지 감흥이 식었다고 해야 할지, 지금 계속해서 그렸다가는 미진함을 남길 것 같았다.


문비는 미련 없이 서재를 나섰다. 시계를 보니 꼬박 세 시간 가량을 꼼짝도 않고 그림에 매달려 있었다. 뒷목과 어깨도 뻐근했다.


거실로 간 문비는 어젯밤에 읽다가 갈피를 펼친 채로 엎어 두었던 책을 집어 들고 소파에 파묻혔다. 그리 무겁지 않은 추리물로 피카레스크식 구성의 마지막 에피소드 한 편을 남겨 놓은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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