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금이가 문비씨랑 친해지고 싶은가 본데, 왜?”
은성이 말했다.
“제가 개를 무서워해요.”
고백하면서 문비는 조금 겸연쩍은 기분이 들었다.
“저런…….”
진심으로 아쉬워하면서 고개를 끄덕인 은성이 커피 담긴 잔을 건넸다.
“이름이 문비인가요?”
라한이 물었다.
“네, 가문비.”
“가문비……. 아주 좋은 이름이에요. 아, 저는 라한, 송라한입니다.”
가문비라고 중얼거릴 때 라한은 미묘한 미소를 희미하게 지었다. 문비는 그 묘한 미소만큼은 남매가 닮았구나 생각했다. 은성도 아까 쑥을 뜯다가 문비가 가문비라고 말하는 걸 처음 들었을 때 꼭 저와 같은 미소를 띠었던 것이다.
“그 표정…… 가문비나무가 떠올라서죠? 다들 그러거든요.”
이름을 알려줄 때 문비가 흔히 겪는 일이었다.
“맞아요. 하지만 다들 그러는 것하고는 좀 다를 거예요.”
은성이 문비의 말을 받으며 별채를 힐긋 쳐다보았다.
“그게…… 노래를 품은 나무잖아요, 가문비나무가.”
잠깐 겨를을 둔 후에 라한이 천천히 말했다. 이어지는 이야기가 있을 거라는 기대감을 주는 어조였다.
“아차, 물 올려놓은 거 끓겠다. 나, 들어가서 쑥버무리 쪄서 나올게.”
은성이 종종걸음을 놓아 안으로 들어갔다.
“노래를 품은 나무라고요?”
“네. 제가 하는 일이 가문비나무의 노래를 발굴하는 것이라고나 할까요.”
“나무에서 노래를 발굴해요?”
호기심의 빛이 문비의 가지런한 이목구비로 번져나갔다. 그 빛이 화장기 없는 정갈한 얼굴에 설핏한 혈색을 불러왔다. 하얀 스카비오사를 닮은 여자였다.
“이를테면요.”
“노래를 발굴한다…… 꽤 근사한 비유로 들려요.”
“꼭 비유라고만 할 수는 없어요. 정말로 그런 일이니까. 실은 바이올린 같은 현악기들을 제작해요. 앞판에 쓰이는 나무가 가문비죠.”
“아아, 바이올린.”
아까 은성이 별채 쪽을 봤던 까닭을 알 것 같았다. 거기가 라한의 작업실일 것이고 가문비나무가 잔뜩 있을 것이다. 이어 새벽의 바이올린 연주가 떠오르고 문비의 표정이 서그럽게 누그러졌다.
“그럼 뒷판은요? 뒷판은 다른 나무인가요?”
“뒷판과 옆판 그리고 스크롤은 단풍나무로 만들어요.”
“혹시 직접 연주도 하실 때가 있나요?”
“작업 시작 전에 한 번씩이요. 가끔 필요하다고 느낄 때가 있거든요.”
오늘 새벽의 바이올린 소리를 들었구나 싶었다. 어렸을 때부터 배웠고, 중학교 3학년 때 레슨 받기를 그만 둔 이후에도 혼자 꾸준히 익혀왔다. 바이올린에 누를 끼치는 연주는 아니라고 내심 만족하지만 전문연주자에 비할 바는 아니라고 자평하기에, 누가 들었다고 하니 조금 쑥스러웠다.
“연주 기교나 수준이나 해석 그런 건 제가 잘 모르지만 곡 자체하고 소리는 좋던데요. 언젠가 스트라디바리우스로 연주했다는 무슨 곡인가를 들은 적이 있는데 같은 곡은 아니었지만 음색이라고 하나 그런 면에서 흡사한 게 있었어요. 뭐랄까 악기와 사람이 서로를 존중하면서 만들어내는 소리라고 해야 하나, 그런 분위기였어요.”
라한이 놀라 휘둥그레진 눈으로 문비를 바라보았다.
“대단한데요? 귀 좋다는 말 많이 들었죠?”
“조금요.”
성악을 전공한 채선이모가 엄마에게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있었다. 문비 쟤, 귀가 예리해도 너무 예리해, 그리고 거의 절대음감 같아. 피는 못 속인다고 제 아버지 내림이겠지.
엄마는 채선이모에게 부탁했다.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말라고. 절대음감이니 뭐니 하는 소리도 제 아버지 닮았다는 소리도 듣고 싶지 않다고. 우리 두 모녀, 그 사람과는 결단코 무관하고 싶다고. 문비 나이 열 살 이전이었던 어느 날의 기억이다.
그리고 고등학생 문비는 그때 그 말을 하던 엄마의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럽고 슬펐던 낯빛과 다시 마주치게 된다. 금기시 되어 있는, 그래서 완전하게 모르고 자란 아버지에 대한 궁금증을 문비가 드러냈던 그 날에.
문비는 고집스러웠고 엄마는 완강하여 결국 모녀간의 첨예한 감정 대립으로 이어졌던 날이었다. 엄마는 굳게 다문 입을 끝내 열지 않았다. 다만 온 생애를 다해도 아물 수 없을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의 통증과 비애가 얼룩진 얼굴로 무너져 울었다.
문비는 아버지가 엄마한테 뭔가 단단히 잘못한 게 틀림없다고 결론지었다. 그런 식으로, 자신에게 아버지라는 존재를 처음부터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 엄마를 이해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