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마루에서 일어서던 문비는 가벼운 현기를 느꼈다. 앓아누웠던 이틀 동안 거의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식욕은 없지만 뭐라도 좀 먹지 않고선 안 될 노릇이었다. 이곳에 온 목적은 휴양이 아니라 일이었고 슬슬 작업을 시작하려면 대충이라도 뱃속을 채워 에너지를 얻어야 했다.
주방으로 간 문비는 식탁 앞에 선 채로 우유에 시리얼을 말아 천천히 먹었다. 간간이 넓은 창 너머의 숲과 산머리와 하늘을 바라보면서 먹는 동안 동이 트고 날이 밝아왔다. 다 먹고 나니 자연스럽게 커피 생각이 났다.
주방 곳곳을 찾아봤지만 커피는 없었다. 여기 오던 날 간단히 장은 봤으면서도 원두 생각을 못했던 것이다.
없음을 확인하자 갈망은 더 절실해졌다. 그 어떤 그리움처럼. 그러나 없는 것은 없는 것, 하릴없는 노릇이었다. 마찬가지로 그 어떤 그리움처럼.
방으로 가 침대를 정리하고 두 개의 캐리어를 열어 짐을 풀었다. 씻고 머리를 빗고 썬크림을 바른 문비가 크로스에코백을 메고 버킷햇을 챙겨 쓰고 현관을 나섰다. 아직 햇살이 숲으로 내려오지 않은 아침, 이름 모를 새들의 지저귐이 맑지다.
문비의 에코백에는 전정가위, 칼, 자, 루페, 채집봉투, 신문지, 크지 않은 사이즈의 스케치북 등 식물 표본의 관찰과 채집에 필요한 도구들과 디지털카메라 그리고 폴라로이드카메라가 들어 있었다.
차가 지나다닐 수 있게 계곡과 개천을 가로질러 놓인 크고 오래된 콘크리트 다리를 지나 개울로 이어지는 좁은 길을 걸었다. 물소리는 한가롭고 풀싹이 자라는 땅은 보드라웠다. 문비는 다리 아래에서 만나는 두 개천 중 맞은편 집이 위치한 언덕의 측면을 흐르는 개울을 거슬러 올라갔다.
직업적인 유심함이 배인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던 문비가 혼자 끄덕였다. 남승효 교수가 말한 그대로였다. 그리 급하지 않은 경사를 이루는 냇가를 약 오륙십 미터쯤 거슬러 올라가자 개울에 잇닿은 기슭을 따라 우거진 갯버들이 나왔다.
복슬복슬 꽃을 피운 갯버들 군락이 연둣빛 안개처럼 아련하다.
처음에는 육안으로 다음에는 루페로, 줄기와 꽃과 잎눈을 시간을 들여 꼼꼼히 관찰했다. 디지털카메라로 여러 각도에서 사진을 찍은 다음 꽃과 잎눈이 달린 작은 가지를 조심스레 잘라 채집봉투에 넣었다.
마지막으로 폴라로이드카메라를 꺼내 오직 한 장의 사진을 찍는 건 말하자면 취미생활이었다. 그 사진들은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사진과는 다른 차원의 무엇으로 남았다.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는다는 건 이를테면 두 번 다시 되풀이될 수 없고 수정될 수도 없는 단 한 시점을 포착하는 행위라고 문비가 엄마에게만 털어놓은 적이 있다.
엄마는 대답했었다. 그렇다면 네가 그 사진들을 보관하는 상자는 유일무이한 찰나들의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겠네.
엄마 생각에 가슴이 시큰거려 가만히 주저앉던 문비가 희미한 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건넛집이 있는 언덕에서 개울로 나 있는 오솔길로 사람이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젊은 여자였다. 굽실거리는 머리를 귀 뒤쪽에서 한데 모아 느슨하게 땋아 내린 그녀는 체구가 작고 왜소했으며 목이 많이 짧았다.
“앞집에 와 있는 사람 맞죠? 거기서 뭐 해요?”
징검다리를 건너온 그녀가 조심스럽고 온건한 태도로 물었다. 얼굴과 이목구비가 대체로 동글동글하여 나이 들어 보이는 생김새는 아니었지만 진중한 분위기랄지 그런 것에서 문비는 그녀가 자신보다 어림잡아 몇 살은 더 위일 거라고 짐작했다.
“갯버들이요, 관찰도 하고 표본도 채집하고…….”
눈앞에 선 그녀는 생각보다 더 자그마했고 등이 굽어 있었다. 척추 장애일 확률이 컸다.
“나는 쑥을 좀 뜯을까 하고…… 동생이 쑥버무리를 좋아하거든요.”
옆구리에 끼고 있던 소쿠리를 내보이며 그녀가 미소를 보였다.
“아, 네.”
“잠깐이면 되는데 나 좀 도와주고 우리 집 가서 커피 한 잔 할래요? 쑥버무리도 먹고.”
동그란 얼굴에 무구한 호의를 솔직하게 드러내고 수줍게 건네는 제안이었다. 커피라는 말에 문비의 눈이 반짝였다. 습관으로 굳어진 아침 식후의 커피 한 잔을 못 마신 허전함이 무심코 반응해 버린 것이다.
“그래도…… 될까요?”
대답 대신 그녀는 문비의 팔을 잡아끌고 지척에 있는 버려진 묵정밭 가장자리로 갔다. 산기슭을 따라 연한 참쑥이 파릇파릇 다보록했다. 그 청신함과 향긋함이 모르는 타인에 대한 마음의 벽을 느슨하게 만드는 것만 같다.
한 번 먹을 만큼의 쑥을 뜯는 건 그녀의 말대로 정말 잠깐이었지만, 통성명을 하고 쑥을 비롯한 몇 가지 봄풀에 대한 감상을 주고받기에 부족함 없는 시간이기도 했다. 자그마한 그녀의 이름은 은성이라 했다.
은성은 문비에게 마당 한쪽의 살구나무 아래에서 커피를 마시자 하고 집으로 들어갔다. 그러고 보니 때마침 잎보다 먼저 피는 살구꽃이 한창이었다.
문비는 꽃그늘에 정원테이블과 함께 놓인 의자들 중 하나를 골라 엉덩이를 걸치고 버킷햇을 벗었다. 저 앞으로 시내가 흐르는 계곡과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콘크리트 다리 그리고 자신이 묵고 있는 집과 병풍처럼 둘러친 울창한 송림이 푸르게 펼쳐졌다.
“컹!”
개가 짖는 소리였다. 문비는 혼비백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성이 들어가면서 열어놓은 현관문 앞에 누렇고 커다란 골든리트리버가 나와 있었다. 개를 무서워하는 문비는 낯빛이 하얗게 질리고 몸이 얼어붙었다.
“안에 들어가 있어, 깨금아.”
다정하면서도 차분한, 남자 음성이 들리고 개는 꼬리를 흔들며 뒤돌아 들어갔다.
문비는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목소리가 난 방향을 돌아보았다. 별채 앞에 남자가 서 있었다. 아마도 은성이 말한, 쑥버무리를 좋아한다는 동생이 바로 그일 터였다. 그렇다면 별로 닮지 않은 남매였다.
남자는 후리후리하고 곧은 체격에 얼굴이 갸름했다. 짙은 남빛의 저지 남방셔츠 위로 먹색의 작업용 앞치마를 두른 그가 천천히 다가왔다. 전체적으로 담백하고 준수한 남자였다. 그가 사색적인 빛을 띤 눈동자로 문비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는 문비의 두 눈이 당황의 기색을 떨치고 특유의 시원스러움을 되찾기를 기다렸다가 이윽고 말문을 열었다.
“우리 누나 손님이신가 봐요?”
라한은 지난 이월의 어느 날에 오슬로공항에서 그녀를 보았었다는 사실을 언급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어차피 그녀의 뇌리에는 없는 일방적인 기억일 테고, 어쩌면 되짚어 떠올리고 싶지 않은 순간일지도 모르니까.
“어, 내 손님이야. 저기 저 앞집에서 한동안 지낼 거래.”
때마침 나오던 은성이 문비를 앞질러 대답했다. 커피 석 잔이 담긴 원목 트레이를 든 은성의 동그란 눈이 쾌활한 반달형을 그렸다.
“깨금, 안 돼. 오지 마.”
라한이 다급하게 외치며 방금 은성이 나온 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는 은성을 따라 나오던 골든리트리버를 붙잡았다. 한쪽 무릎을 굽혀 개의 목을 안은 라한이 무어라 소곤소곤 속삭이고는 ‘그러니까 깨금이는 안에 들어가 있는 거야, 착하지?’ 하고 말했다.
개는 알아들었다는 듯 순순히 안으로 들어갔다. 라한이 현관문을 닫고 살구나무 아래로 돌아오면서 앞치마를 벗었다. 비어 있는 빨래 건조대에 앞치마를 걸쳐 놓은 라한이 정원테이블에 합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