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라 서브스톰 - 1

by 화진


살구꽃의 분홍빛 환함으로도 밝히지 못하는 그늘을.

그 그늘에 깊이 침잠된 여자를.

본 적이 있다.


라한은 작업용 앞치마를 벗으려던 것도 잊은 채 얼마 동안 여자를 응시했다. 오전 작업 가운데의 휴식 시간이 되어 별채의 작업실에서 나와 본채로 가려던 참에 그녀를 발견했던 것이다. 그런데 난데없이 시야를 채운 낯선 그녀가 왠지 눈에 익었다.


살구나무 아래의 그녀가 버킷햇을 벗더니 손가락빗으로 단발머리를 정돈했다. 이마에서부터 머리 뒤까지 몇 번이고 빗어 내리는 동작을 보던 라한이 나직한 입속말을 중얼거렸다. 오슬로공항, 카페.


저 동작, 저 옆얼굴, 거기에 드리운 그늘.


이전에 그것들을 맞닥뜨렸던 곳이 노르웨이에서였다는 것을 라한은 기억해 냈다. 겨울의 끝 무렵, 오슬로공항 내 작은 카페에서였다. 처음 라한이 그녀를 눈여겨본 건 같은 한국인일 거라는 직감에서 오는 단순한 동류의식에서였다.


커피를 테이크아웃한 라한이 테이블 바로 옆을 스쳐 지나가는데도 그녀는 시선을 들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테이블에 놓인 커피에 닿아 있었다. 하지만 라한은 곧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커피를 보고 있지 않다는 걸.


그 눈빛은 무망한 동시에 골똘했고 무슨 의문을 품은 듯 보였다. 그녀가 보고 있는 게 그녀 자신의 심연이라는 걸, 그녀를 관통하고 간 어둠이라는 걸 라한은 알아챘다.


그의 삶에도 그런 것들을 망연히 들여다보았던 한 시절이 있었으므로.


*


극야의 하늘에 빛의 폭풍이 몰아쳤다.


얼어붙은 프레스트반네트 호수에 쌓인 눈이 연두색으로 물들고, 현지 가이드는 열띤 목소리로 환호했다.


“오로라 서브스톰이야, 문비 너는 행운아구나!”


오로라 서브스톰이 오로라 현상의 가장 강력한 양상이라는 건 문비도 대강 알고 있었다. 춘분과 추분을 즈음하여 특히 발생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과 그렇다고 그 시기에 오로라 스팟엘 간다고 하여 반드시 오로라 서브스톰을 볼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사실 역시도.


그러나 문비는 가이드의 말에 동감할 수 없었다. ‘너는 행운아’라는 그 말. 이 여정이 시작되는 비행기에 오르기 전에 유일한 가족과의 영원한 이별을 겪었는데, 그 일에서 비롯된 여정인데. 행운아라니, 행운, 행운이라니.


문비는 씁쓸하게 자조했다. 엄마가 죽지 않았다면 문비는 이 시점 여기에 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엄마의 마지막 부탁이자 유언만 아니었다면.


녹색에 흰색과 분홍색이 얼마간 섞여든 거대한 빛의 휘장이 창공과 지면을 밝히며 광막하게 폭주했다. 이곳까지 온 사정이 어떠했든 일생일대의 장관을 목도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했다. 문비는 태양과 지구가 합주해내는 경이로운 아름다움에 승복되지 않을 수 없었다.


역동하는 오로라가 문비의 안에서 설명할 수도 붙잡을 수도 없는 어떤 선율이 되어 떠다녔다. 마치 혈관을 타고 흐르는 것처럼. 문비에게는 종종 그런 순간이 있었다. 풍경이 희미한 음의 흐름으로 변하는, 스스로도 불가해한 순간이.


춘분을 일주일 남짓 앞둔 깊은 새벽 홀연히 프레스트반네트 호수를 찾아온 오로라 서브스톰 아래에서 문비는 엄마가 죽은 지 닷새 만에 처음으로 울음을 터뜨렸다. 그 닷새를 어떻게 보냈는지 알 수 없었다. 기억을 잃은 사람처럼 아득했다.


이제야 체감이 온 것이었다. 엄마는 죽었다, 이제 내 엄마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다시는 만날 수 없다. 만질 수 없다. 다정하고 든든한 등에 얼굴을 묻고 냄새를 맡을 수 없다. 고소하고 달금했던 그 냄새, 엄마 냄새…….


“드물지만 문비 같은 사람들이 있어요, 오로라를 보고 우는 사람들. 자연의 위대함이죠.”


내막을 알 리 없는 가이드가 덧붙였다.


“그런데, 결국에는 다 같은 데로 이어지는 것들이에요. 너무 아름다운 것, 너무 슬픈 것, 너무 좋은 것, 너무 아픈 것, 그런 것들…… 눈물에 닿아 있는 것들.”


시선을 오로라에 고정한 채로 그녀는 담담하게 덧붙였다. 이쪽의 감정을 침범해 들어오지 않으면서도 특별한 조심 또한 묻어 있지 않아서 도리어 든든한 기분을 주는 어조였다.


흐느낌 사이로 꺽꺽거리며 문비가 말했다.


“고마워요, 토니에.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