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켰던 그 바이올린은 스트라디바리우스가 아니라 진창현 선생님 작품이에요. 진창현 선생님은 스트라디바리우스에 가장 근접한 바이올린을 만들었다는 평을 받는 분이거든요. 그러니 문비씨가 제대로 들은 거예요. 스트라디바리우스나 진창현 선생님의 바이올린은 연주하는 사람이 악기를 제압하려고 들면 좋은 소리를 얻을 수 없다고들 하죠. 존중과 조화를 통해서만 그 악기들의 진가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말이에요.”
라한이 간직한 애정이 광채로 묻어나는 것 같았다. 반짝거렸다. 빠르지 않지만 열띤 말들이. 말을 하는 사람이.
“혹시 바이올린 소리가 수면에 방해가 됐을까요?”
문득 생각이 거기에 미쳐서 라한이 물었다.
“아뇨. 깨어 있었어요. 저기 낙엽송 아래에 나와 있다가 들은 거예요. 앞으로도 제 걱정은 말고 필요하면 연주하세요. 저 워낙 일찍 일어나는 체질이거든요.”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쑥버무리를 들고 은성이 돌아왔다.
“무슨 얘기가 그렇게들 재밌을까?”
“새벽의 샤콘 얘기.”
손을 들어 뒤통수를 쓱쓱 쓸며 라한이 싱긋 웃었다.
“곡명이 샤콘인가 봐요?”
문비의 궁금증을 풀어준 것은 은성이었다.
“맞아요. 바흐가 육촌이자 첫 번째 아내였던 마리아 바르바라와 사별한 후에 작곡한 무반주 바이올린 파르티타 2번의 5악장이에요. 동생의 샤콘 연주는 힐러리 한을 모방한 거라 꽤나 고지식한 편이죠. 그래도 저는 동생이 연주하는 샤콘이 좋아요. 물론 힐러리 한의 샤콘 다음으로요.”
남매가 더불어 웃었다. 아주 잠시 동안이었지만 타인은 끼어들 수 없는 그들만의 영역이 구축되었다가 사라지는 것을 문비는 보았다. 형제자매가 없는 문비가 알지 못하는 영역이었다.
“문비씨는 무슨 일 해요? 식물이랑 관련 있는 일인 것 같던데?”
작은 접시에 담긴 쑥버무리를 맛보던 문비에게 은성이 물었다.
“식물학 그림을 그려요.”
“보태니컬 아트 말이죠?”
“네, 그런 건데 지금까진 학술용이나 도감에 들어가는 걸 주로 그려 왔어요.”
“그럼 아까 그 갯버들도 그림으로 그리려는 거고요?”
이제 은성은 더 이상 수줍어하지 않았다. 친근하게 문비를 대했다. 문비가 보았던 첫인상 그대로 아이 같은 데가 있는 사람이었다. 천진하고 타인에 대한 경계심이 강하지 않다. 타인을 향해 마음을 여는 것도 빠르다.
“네, 이번엔 조금 색다른 의뢰를 받았거든요.”
“어떤 의뢰인데요? 책에 들어가는 삽화? 아니면 제품 디자인 같은 데 쓰일 거? 아, 이렇게 꼬치꼬치 묻는 거 실례인가요?”
은성은 문비와의 대화가 즐거웠다. 그도 그럴 것이 여기는 또래의 젊은이를 구경하기 힘든 산골짜기였고, 은성이 문비에게서 좋은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라한은 아까부터 듣기만 하면서 묵묵히 자신만의 휴식을 취하는 참이었다.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고 간식을 먹고 굳은 어깨와 목 근육을 풀어주는 스트레칭을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궁금했다. 조금은 수다스러운 은성의 질문 세례에 문비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아니, 아니에요. 실례 아니에요. 저를 아껴 주시는 은사님께서 식물학자이시면서 수필 등단 이력도 있는 분이거든요. 수필집을 내실 예정인데 식물학자를 꿈꾸던 어린 시절을 소재로 쓰는 수필이래요. 거기에 추억의 풀과 나무들을 식물학 그림으로 그려 넣어서 그림이 있는 수필집으로 만드신다고 저한테 그림을 의뢰하셨어요.”
남승효 교수는 문비의 은사이면서 채선이모의 남편이기도 했다. 의뢰를 받은 건 좋은 일이었지만 문비는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그런 수필집을 정말 내기는 내는 건지. 혹여 엄마의 죽음으로 상심에 빠진 자신을 위해 없는 일을 만든 건 아닌지.
채선이모와 남교수라면 충분히 그럴 만한 사람들이었고 그림이야 그려 놓으면 또 언젠가 다른 쓸모에 쓰일 수도 있으니까.
문비의 자상한 대답을 듣고 나서 라한은 그녀가 예의 바른 사람이거나 선량한 사람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혹은 양쪽 다거나. 어쨌거나 좋은 일이었다. 은성을 위해.
“동네 할머니들한테 들은 적이 있어요. 저 앞집 주인이 대학 교수이시라고. 그분이 은사님?”
“맞아요. 여기가 그분 고향이에요.”
남승효 교수는 고향집을 수리하여 별장 삼아 이용했다. 문비가 머무는 집이 바로 그 집이다. 문비는 어렸을 때부터 엄마와 함께 채선이모의 초대로 거의 매년 이곳에 놀러 오곤 했다. 덕분에 지내기에 불편함이나 낯섦이 없었다.
“아하, 그렇게 된 거군요.”
은성이 머리를 끄덕였다. 즐거움 때문인지 동작이 컸다. 당분간 문비와 이웃으로 지낼 수 있다는 사실이 단순하고 조용하던 생활에 명랑한 활력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전 이만 작업실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두 분 얘기 나누세요.”
라한이 의자에서 일어나 작업용 앞치마를 둘렀다. 팔꿈치까지 걷어붙인 소매 아래로 드러난 근육질의 팔이 오전의 봄 햇살 아래 늘씬했다. 매일 나무와 교감하는 사람이어서인가. 라한이야말로 나무를 닮았다. 구과식물에 속하는 나무, 곧게 높이 자라는 침엽수를.
“그래, 수고하고. 점심 뭐 할까? 먹고 싶은 거 있음 말해.”
“누나가 먹고 싶은 걸로.”
“또 그런다. 그래, 알았어.”
문비는 라한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라한은 똑같이 인사하고 성큼성큼 걸어 별채로 들어갔다.
라한은 작업대 앞에 앉아 크고 둥근 끌을 잡았다. 바이올린 앞판의 아칭 부분을 다듬는 과정이어서 작업대 위는 둥그스름한 나뭇밥이 수북했다.
가문비나무로 깎은 저 앞판은 장차 어떤 노래를 들려줄까. 물끄러미 바라보던 라한은 끌을 도로 내려놓고 의자를 뒤로 당겨 작업대에서 조금 물러앉았다.
창 너머로 문비의 옆얼굴이 보였다. 은성이 무슨 말을 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본채로 들어갔다. 분위기로 보아 커피를 한 잔 더 권한 것 같았다.
혼자 남은 여자의 상아색 카디건에 드리운 꽃그늘이 바람에 흔들렸다. 그 얼굴에 되돌아온 심연의 그림자, 환하게 푸른 봄빛도 밝히지 못하는 그림자 위로 살구나무가 뿌리는 꽃비가 어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