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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새벽 Aug 26. 2022

자기 주도성과 기다림

주님의 귀한 딸, 욱하는 엄마들에게

 

 홈스쿨링에 대해 이런 글, 저런 글을 써 내려가면서 일상에서는 아이에게 욱의 연속인 나날을 보내고 있다. 글에서는 아이를 잘 키우는 척, 온유한 척, 온갖 척척척으로 꾸미면서 일상은 이렇다니 하는 공격이 들어온다. 한두 번 당한 공격이 아니다. 그럴 때에는 내가 잘나서 쓰는 게 아니라 나는 그저 주님께서 발견하게 하신 것을 쓸 뿐이다 하고 가볍게 쳐낸다.

 신랑이 첫째와 둘째를 데리고 나간 주일, 두 돌을 겨우 넘긴 셋째와 보낸 하루는 평화로움 그 자체다. 마치 첫 아이를 낳고 아이와 함께 까르르 대던 날로 돌아간 듯하다. 첫 아이를 낳고 아이가 말문이 트이기 전의 어린 시절, 화날 일도 없고 여기저기 치즈, 바나나로 치대어 놔도 닦으면 되지 허허 하던 여유로운 날들이었다.

 첫째와 둘째가 일정을 마치고 돌아왔다. 반갑고 애틋한 마음은 잠시, 다시 욱이 올라온다.

 


 "주님, 아이들이 일어나면 같이 아침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예배 때마다 화를 내네요. 어쩌죠?"

 어느 새벽시간 주님께 여쭤본 적이 있다. 잠잠히 있는데 아이들이 예배를 인도하게 하라는 마음을 주신다. 한동안 첫째와 둘째가 번갈아 가며 가정예배를 인도한 적이 있다. 아이들이 지금보다 어렸을 때 한참 자녀 주도 가정예배를 흉내 내 봤다. 그러다 역시 내가 화가 나서 흐지부지 됐었다. 그런데 다시 아이들이 주도하게 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한 마음을 주시니 조금은 기대하는 마음으로 순종하기로 했다.


 첫날, 둘째가 인도하기로 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자라서 본 가닥이 있고 해 본 가닥이 있다. 제법 매끄럽게 예배를 인도한다. 찬양은 원래부터 좋아해서 정해진 곡수를 넘어가며 열심을 내는 것이 놀랍지 않다. 정작 놀란 것은 말씀 순서에서다.

 엄마가 인도하던 때는 이 인고의 시간이 빨리 지나길 바라는 마음에 말씀 순서 때 암송 몇 구절 하고 바로 기도로 넘어가곤 했다. 노는 시간도 아니고 가정예배를 드리는데 뭐가 그리 싸울 일이 많은지 서로 하고 싶은 찬양을 하겠다고 싸우고, 서로 드럼을 치겠다, 기타를 치겠다 싸워대는 모습을 보노라면 욱이 올라온다. 새벽부터 그런 기도를 한 이유였다. 하루의 첫 시간인 가정예배시간에 제일 화를 많이 내기 때문에.

 그런데 오랜만에 둘째가 인도하는 예배에서 웬일로 다툼 없이, 엄마의 욱도 없이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찬양이 끝나고 드디어 말씀 순서가 되었다.

 "오늘은 성경을 읽겠습니다. 어디냐면 민수기(둘째는 그즈음 민수기를 통독하고 있었다.) 29장 2절부터 21절까지입니다. 교독하시겠습니다."

 개인 통독이라면 모르겠지만 아이들과 서로 교독하는데 21절까지라니. 더군다나 여섯 살인 둘째는 아직 더듬더듬 읽는데 첫째가 힘들다고 징징대고 그럴 상황이 예상되었다.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교독하기 시작하는데 웬걸 아이들이 불평 한마디, 신음소리 하나 없이 다 읽어 내는 것이다.

 "마지막은 같이 읽으시겠습니다."

 마지막 합독까지 야무지게 인도한다. 너무 놀라웠다. 예배가 자신의 예배가 되자 아이들은 수고로움을 기꺼이 감당했다. 둘째는 뒤이어 홈스쿨링 시간표 진행까지 인도했다. 예배 이후의 운동시간이 되자 타이머를 맞춰놓고 자기가 하고 싶은 스트레칭과 근력운동을 적극적으로, 말 그대로 자기 주도적으로 열심히 했다. 이쯤 되니 상황을 곱씹어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새벽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주님께서 '자기 주도'라는 키워드를 던져주신 것 같아서다.


 그동안 내가 주도권을 너무 많이 쥐고 있어서 그렇게 아이들에게 화를 많이 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아이들을 내 취향에 맞게 쥐락펴락하고 싶은데 그게 안되니 화가 많이 났었구나 싶었다. 주님은 그동안 여러 방면으로 이야기를 해오셨다. 용납해주고 공감해주라는 말씀도, 자녀에 대한 주권을 주님께 내려놓으라는 응답도 모두 나를 가장 잘 아시는 주님께서 내가 화를 표출하는 코드를 아시고 내리신 처방들이었다. 이번에 새롭게 주신 처방은 '자기 주도'이다. 내가 움켜쥐고 있던 주도권을 아이들에게로 조금씩 이양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아이들이 자기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것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첫째, 가정예배를 인도하는 일이다.

 앞서 나눈 이야기에서와 같이 가정예배를 자녀가 주도할 수 있다. 찬양을 좋아하는 둘째가 가정예배를 인도할 때에는 찬양 한 곡 한 곡마다 주님의 섬세하신 인도하심이 느껴진다. 그때 아이에게 참고할만한 찬양곡집을 쥐어준다면 더욱 좋다. 아무 도구 없이 무작정 콘티를 짜라고 하면 한주 내내, 혹은 한 달까지도 좋아하는 찬양만 부를 수 있다. 우리 아이들은 반복에 강하다. 그것도 나름의 은혜가 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가정예배 때 쓸 수 있는 찬양곡집을 권해준다면 더욱 풍성하게 선곡할 수 있다. 우리 아이들이 찬양을 많이 기억하지 못해서 선곡을 못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자녀가 주도하는 가정예배를 성공적으로 드렸다. 그 다음날은 첫째가 인도하기로 되어있었다. 찬양을 특별히 싫어하는 것은 아닌데 그날따라 첫째는 찬양을 한 곡만 하도록 인도했다. 말씀도 무척 짧았다. 이 녀석이 예배드리기가 싫구나 하는 생각에 또 욱이 올라왔다. 그런데 기도시간을 진지하게 아주 길게 인도하는 것이다. 사랑방 식구들 기도부터 선교여행 떠난 친구네 가정 기도까지 꼼꼼하게 챙긴다. 오해했던 것이 너무 미안할 정도였다. 첫날은 둘째가 긴 본문 말씀을 읽는 수고를 넉넉하게 감당한 것에 놀랐다면 둘째 날은 첫째가 기도의 수고를 자처한 것에 크게 놀랐다. 때가 되어 아이들에게 주도권을 넘겨주니 아이들의 개성대로 예배가 풍성해지는 것을 경험하게 하신다.


 둘째, 습관에 관한 일도 자기주도적일 수 있다.

 우리 집 둘째는 양말에 애착이 있다. 아기 때부터 모자, 장갑 등 장신구를 유난히 좋아하더니 양말에 결국 애착이 생겼다. 밤이나 낮이나 여름이나 겨울도, 그리고 집에서조차 양말을 신는다. 한여름이 되어가면서 덥다 덥다 하면서도 양말을 벗질 않는 것이다. 결국 잠자리에 누워서 덥다 덥다 하는 둘째에게 양말을 벗도록 다그쳤다. 양말을 신고 잘 테니 새벽에 벗겨달라는 둘째의 요구를 거절하고 지금 양말을 벗으라고 했다. 그래도 굳이 신고 자겠다는 둘째를 기다려주기로 마음을 돌리고 잠들었다. 그런데 기다려주니 둘째가 아침에 맨발로 나오는 것이다.

 "엄마 나 새벽에 내가 양말 벗고 잤어."

 습관과 훈육의 문제도 결국 주도권을 조금씩 내려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든 지점이다. 내가 아이의 습관을 고친다는 생각을 내려놓을 때 주님께서 아이를 만지신다. 미숙한 아이에게 주도권을 넘겨주는 일 같아 조마조마하고 위태로워 보이지만 실상은 주님께 주도권을 넘겨드리고 기다리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이를 기다려주는 일이기도 하다. 엄마인 나는, 더군다나 24시간 아이와 붙어있는 홈스쿨러로서 아이의 필요와 아이의 자라는 때를 다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주님만이 아시는 일이다. 주도권을 내려놓는 일은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겸손하고 낮은 자리에 거하는 일이다.


 셋째, 갈등 해결에 관한 일도 아이들에게 조금씩 맡길 수 있다.

 홈스쿨러의 시간표에 놀이시간이 있다면 그 시간의 실상은 아이들이 노는 시간이 아니라 엄마가 놀이를 지도하는 시간이다. 놀이를 매개로 형제간에 지혜롭게 의사소통하는 방법을 지도하는 시간이다. 놀이시간에, 특히 형제가 함께 놀기로 결심했다면 오래지 않아 크고 작은 문제로 다투는 소리가 나기 시작한다. 화가 난 엄마는 달려가 상황을 알아보고 잘잘못을 따져주고 그럴 땐 이렇게 하는 거예요, 지도해주는 시간인 셈이다. 더 화가 났다면 상황을 알아보는 순서는 스킵이다. 함께 놀던 장난감을 바로 치워버리거나 타임아웃이다. 이러한 과정의 반복을 통해 화가 쌓인다.

 막내에게 누워서 수유하는데 첫째와 둘째가 거실에서 놀다가 다투는 소리가 난다. 둘째는 놀이의 규칙을 어기고 고집을 부리는 상태이고 첫째는 둘째와 같이 놀고는 싶은데 둘째가 억지를 쓰니 화가 나서 울어대는 상황이다. 수유하느라 나가서 중재할 수 없고 첫째의 울음이 커져갈수록 내 속에서는 100도씨를 넘어서려는 화가 부글부글 거리며 폭발하기 직전이다. 한참을 그러다 웬일로 엄마의 중재 없이도 상황이 진정되고 둘 사이에 극적인 타협이 이루어졌는지 울음은 그치고 형제의 놀이는 재개되었다.

 하루 종일 엄마에게 고자질하러 오는 형제에게 재판관 노릇을 해주다 보면 아이들은 스스로 문제를 깨닫고 해결방법을 찾기보다 서로 싸우기만 한다. 그러나 아이들은 스스로 해결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서로 양보하고 배려하는 방법을 배운다. 아이들이 스스로 해결하도록 방치하라는 뜻이 아니다. 재판관 노릇도, 방치도 아니라 옆에서 지켜보되 아이들 스스로 해결방법을 찾아나갈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아이들이 좀 더 어릴 때에는 "그럴 땐 '형아가 먼저 하고 줄게요' 하고 말하는 거예요.", "형아 나도 하고 싶은데 다하고 주세요 하고 말해보세요." 일일이 지도해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꾸준히 지도하되 가끔은 그저 울며 고자질하는 아이들을 토닥이며 안아주기만 해도 될 때가 있다. 엄마의 품에서 충분히 상대방을 용납해주고 넘어갈 수 있을 만큼 품이 넓어진 아이들은 울음을 그치고 아무렇지 않게 사이좋게 놀기 시작한다. 또 때로는 어른의 시각에선 찾아낼 수 없지만 아이들 입장에선 충분히 서로 만족스러운 해결책을 찾아내기도 한다. 그리고 그 해결책은 서로의 마음을 엄마보다 더 잘 아는 형제가 한 걸음씩 양보하고 배려한 해결책일 때가 많다. 모두 엄마가 성급하게 참견하려는 마음을 참고 기다려주었을 때 일어나는 일이다.


 넷째, '학습' 있어서도 우리 아이들자기 주도적 능력을 믿어주자.

 '자기 주도'라는 키워드로 읽을만한 책이 있는지 검색해봤다. 대부분이 자기 주도 학습에 관한 책이었다. 그만큼 한국 부모들이 관심 있어하는 부분이면서 한국 공교육으로 얻어내기 쉽지 않은 부분이라는 반증이다.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며 공부하는 학생들이 자기 주도성을 기르기에 우리나라의 교육환경이  좋은 환경은 아닌  같다. 자기 주도적으로 학습하는 훈련을 하자면 자신의 학습을 자신이 계획하고, 수행해보며,   결과, 실패도 해보고 다시 계획을 수정해보기도 해야 한다. 하지만 학교의 모든 수행과정들이 내신에 반영되고  번의 실패도 조심스러운 교육환경에서 담대하게 자기 주도적으로 공부할 자신감을 갖기란 쉽지 않다. 또한 부모들의 입장에서도 입시전문가, 교육전문가에게 맡겨 관리받게 하고 싶지, 불안하게 자녀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지켜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면이 '자기 주도'에 대해 논할 때 필연적으로 '기다림'에 대해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우리 아이들에게 주도권을 넘겨주려면 아이들을 믿고 기다려주는 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자녀의 자기 주도란 결국 부모의 기다림을 통해 이루어지는 일이다. 아이들이 미숙한데 어떻게 믿고 기다려줄까 싶지만 아이들을 믿어주는 일은 결국 아이들이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자녀이고 주님께서 키우심을 믿는 일이다. 그 과정에서 기다림이란 방치가 아니고 아이의 옆에서 지켜보며 순간순간 기도로 주님이 하시는 일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홈스쿨링을 시작할  나에게 주신  마음이 '관계'였지만 그렇다고 학습에 관한 것을 불성실하게 끌어오진 않았다. 오히려 쉬고 싶어 하는 아이를 채근하며 억지로 끌고 왔다. 그러다 문득 예배드리며 공부를 잠시 내려놓으라는 마음을 받았다. 단호하게 결단하고 매일 밖으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에 신까지 났다. 하지만 감동은 감동받았을 때뿐이고 다음날 아침, 그래도  과목은 공부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손에 주도권을 꼬옥 틀어쥐려는 것이다. 그런데 아침에 늦게 일어나 어기적어기적 걸어 나오는 둘째이마가 뜨끈하다. 결국  의지가 아니라 상황에 의해 주님의 뜻이 관철되었다. 그리고 하루 만에 컨디션이 회복된 둘째와 그리고 첫째도 덩달아   내내 공부를 내려놓고 있다. 아이들이 과연 언젠가 공부하고 싶다고 할까 싶고 언제까지 이렇게 놀게 해야 할까 싶다. 하지만 부모가 기도로 기다리는 시간이 주님께서 아이들의 자기 주도성을 키우시는 시간이라 믿고 기다려 보려고 한다.



 자기 주도에 대해서 의문을 가진 적이 있다. 자녀가 미숙한데 정말 주도권을 주고 자녀 마음대로 하게 하는 것이 옳은가 라는 의문이다. 이는 자기 주도성에 대해 잘못 이해해서 갖게  의문이.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세기 1장 27절)  

 주님께서는 그분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다. 자기 주도성이란 특성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의 성향이라면 올바로 이해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계발해야  것이다. 그러한 믿음으로 자기 주도성의 방향에 대해 묵상하고 묵상했을  얻은 결론은 자기 주도성의 핵심은 '주도성(主導性)' 있지 않고 '자발성'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도 아담에게 스스로 선택하게 하셨다. 스스로 하나님을 선택하는 사랑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거하게 하셨다. 아담과 하와는 적어도 선악과를 선택하기 전까지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 그리고 에덴동산이라는,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 안에 거했다. 하나님은 그분의 피조물인 사람이 자발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선한 가치를 선택하게 하시려고 자기 의지를 주셨다. 자기 주도성이란 이러한 방향으로 이해해야 한다. 자발성이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기 내부의 원인과 힘에 의하여 사고나 행위가 이루어지는 특성이다. 그래서 자기 주도성의 핵심이 자기 주도, '자기 마음대로'가 아니라 '자발성'에 있다는 말의 의미는 '선한 가치'를 향해 자발적으로 자기의 일을 이끌어나가는 것, 그것이 주님이 인간에게 주신 자기 주도성의 원래 의미라는 것이다.


 결국 우리 아이들이 자기 주도적으로 무언가를 하도록 이끌고 또 기다려주는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기 의지를 주시고 기다려주신 일과 닮은 일이다. 자녀의 미숙함을 알지만 믿고 지지하기에 선택권을 주고 기다려주는 일은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는 일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앞서 살펴본 네 가지 영역(자녀 주도 가정예배, 자기 주도 습관훈련, 자녀 주도 갈등 해결, 자기 주도 학습)을 통해 자녀는 자기 주도성을 훈련하고, 부모는 기다리는 훈련을 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배울 수 있다.



 욱하지 않으려고 아이들에게 주도권을 넘겨주고 싶었다. 내가 너무 내 위주로 하려고 해서 화가 나나 싶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스스로 하면 좀 화가 덜 나고 행복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있었다. 그래서 주님이 나에게 '자녀 주도'를 처방하셨구나 하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주도권을 넘겨주고 아이들이 스스로 할 수 있게 되면 욱하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이들이 자라는 시간을 기다려줄 때 욱하지 않게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에게 '자녀 주도'를 처방하신 것이다. 또 그래서 이 글을 나처럼 욱하고 또 매일 밤 괴로워하곤 하는, 사랑하는 주님의 딸인 엄마들에게 보내고 싶었다.

 자녀는 어리고 유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인내를 가지고 섬세하게 대해야 한다고, 알맞고 적당한 세기로 물을 줘야 하는 어린 식물을 다루듯이 가르쳐야 한다고 J.C. 라일은 <부모의 의무>에서 말했다.  대목을 읽는데 호스에서  하고 터져 나오는 물줄기에 줄깃대가 꺾여버리고  여린 식물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져 가슴이 아픈 느낌마저 들었다. 그 대목을 읽고 나서 우리 아이들을 대하는  말과 행동이 섬세해지기 시작했다. 마치 여리디 여린 식물을 다루듯이 말이다. 자녀의 자기 주도성이 자라는 시간을 기다리는 우리의 태도가 그러했으면 좋겠다. 우리 아이들이 지금은 여린 식물이지만 거센 비바람에도 결국 든든히 서있을 나무로 자랄 것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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