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치지 않고 롱런하는 홈스쿨링을 위하여
"애들 스마트워치 하나씩 사주는 거 어때?"
요즘 스마트워치를 하고 다니는 아이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러나 24시간 엄마와 붙어서 홈스쿨하는 우리 아이들에게는 스마트폰이 필요 없다. 폴더폰조차 없는데 스마트워치라니. 신랑이 조심스럽게 물어보는데 단번에 반대를 표했다. 뼛속까지 짠순이인 나에게 기본으로 탑재된 개념은 '소비는 원함(want)이 아니라 필요(need)에 의해서만!'이다. 필요하지 않은데 산다니, 그것도 아이들 장난감도 아닌 용도불명의 물건을 사준다는 게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 후로도 신랑이 한번 더 물어보는데 미간까지 찌푸리며 반대했다. 그러나 며칠 후 신랑은 중고 스마트워치를 구해왔고 아이들 손목에 채워줬다. 결국 자기 뜻대로 할 거면서 나에게 묻긴 왜 물었나 하는 마음에 화가 났다. 식사 준비를 하다가 부글거리는 마음으로 인덕션을 부여잡고 기도를 했다. 그래도 남편의 뜻을 존중하고자 하는 한 톨 정도 되는 마음을 귀하게 보셨는지 상황을 타개할 한 줄기 빛을 주셨다. 남편이 왜 그렇게 사주고 싶어 하는지 물어봐야겠다는 마음이 든 것이다.
"여보는 애들한테 왜 그렇게 그걸 사주고 싶은 거야?"
그 한마디에 신랑이 마음의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두 달의 시간 동안 지치지 않고 롱런하는 홈스쿨링을 하기 위한 여러 방편에 대해 글을 나눴다. 그 마지막 이야기로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려고 한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에베소서 5장 22-24절)
현숙한 아내이자 엄마로 서기 위해 성경 말씀을 나누는 모임에서조차 에베소서 6장은 다소 부대끼는 말씀이다. 그만큼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증거다. 겉으로는 남편을 존중하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속으로는 남편을 손에 쥐고 휘두르려고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나부터 그 어려움을 고백하게 된다. 말씀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 지금의 시대에 적합한지 따지고 싶은 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그에 대한 논의보다 가정 안에서 에베소서의 말씀대로 살았을 때 어떤 축복이 있었는지, 그리고 엄마로서 지치지 않고 홈스쿨링을 지속하기 위해 에베소서의 말씀이 얼마나 유익한 말씀인지에 대해 논하려고 한다.
우리 가정이 홈스쿨링을 결단하고 제일 먼저 받은 축복은 에베소서 말씀으로 가정이 세워지는 축복이었다. 홈스쿨링을 시작할 즈음 아내가 가정의 일을 진두지휘하면 쏟아지는 비를 그대로 맞지만 남편의 권위 아래로 들어가면 우산 아래로 들어가 비를 피하게 된다는 말씀을 들었다. 말씀 그대로 내가 남편의 권위 아래에 있지 않고 대열에서 이탈해 있을 때는 가정에 질서가 세워지지 않았지만 남편을 머리로 삼아 순종하니 부모와 자녀 간의 질서도 저절로 잡힌 일이 있었다. 홈스쿨링을 결단하던 즈음 말 그대로 천방지축이던 둘째가 특별히 큰 수고 없이 질서가 잡힌 것이다. 엄마의 손에도 잘 잡히지 않고 아빠도 "둘째는 좀 역부족이야, 내 힘으로는 안돼."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럴 때면 늘 아빠의 훈육이 못 미덥고 속으로 '저럴 땐 이렇게 해야 하는데' 하고 이리 따지고 저리 따졌다. 하지만 집안의 가장이니까 따지지 않고 따르기 시작했을 때 둘째도 이상하리만치 저절로 아빠의 권위 아래로 들어갔다. 말 그대로 남편의 권위라는 우산 아래로 들어가니 비를 피하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나의 수고가 아이를 바꾼 것이 아니라 그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질서에 순종하니 아이가 변화됐다.
남편의 권위 아래로 들어가면 엄마로서 해왔던 불필요한 수고를 덜어낼 수 있다. 그래서 지치지 않고 롱런하는 홈스쿨링을 하기 위해서는 남편의 감독이 필요하고, 그 감독하는 손길에 순종하는 일이 필요하다. 홈스쿨링의 어떤 부분에서 남편의 감독이 필요한지 알아보자.
첫째, 남편과 함께 '가정의 규칙'을 만들자.
보편적으로 옳은 가치 이외에 가정 안의 소소한 사항에 대한 규칙을 세울 수 있다. 예를 들어 아빠가 퇴근하셨을 때에는 모든 가족이 나와서 맞이한다, 식사를 할 때에는 아빠가 숟가락을 드시기 전에는 먼저 먹지 않고 기다린다 등의 규칙이다. 가장의 권위를 세우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이와 같은 규칙을 세우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규칙을 세우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가정마다 세울만한 가정의 규칙은 가정의 수만큼 다양할 수 있다. 어떤 규칙을 세우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남편과 함께 규칙을 세운다는 것이 중요하다.
엄마 혼자 규칙을 세우고 아이들과 적용하다 보면 상황에 따라 이랬다 저랬다 일관성 없이 흘러가게 될 가능성이 있다. 남편과 함께 규칙을 세우면 일관성 있게 적용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엄마의 입장에서도 혼자 편의에 따라 세운 규칙이 아니라 가장의 권위 아래에 세워진 규칙이기 때문에 상황의 변수에 휘둘리지 않고 일관성 있게 적용할 수 있게 된다. 엄마의 성향에 따라 저는 혼자 규칙을 세워도 일관성 있게 잘 적용합니다, 하는 분이 계실 수 있다. 그러한 경우에도 남편과 함께 의논해서 세우는 시간이 의미가 있다. 엄마 혼자 규칙을 세우다 보면 어떤 때는 조금 과하게, 비현실적으로 엄격하게 규칙을 세우게 될 때가 있다. 그럴 때 가장의 조망하는 시각이 함께 한다면 현실적이고 아이들 수준에서도 과하지 않은 규칙을 세울 수 있다.
둘째, 홈스쿨링 진행 상황에 대해 가장에게 정기적으로 감독을 받자.
앞서 말한 것처럼 가장이 함께 할 때 엄마의 시각으로는 볼 수 없는 부분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아빠가 홈스쿨링 진행 상황을 정기적으로 감독하는 것이 유익하다. 보통 아빠가 쉬는 날은 아이들도 홈스쿨링을 쉬는 날이 되기 쉽다. 그러나 가끔은 평일의 일정대로 홈스쿨링을 진행해보자. 그러면 아빠가 홈스쿨링의 진행 상황을 감독할 수 있다.
"그러지 말고 몇 분까지 하라고 얘기해주는 게 더 좋을 것 같은데?"
소소한 심부름에 대해서 아이들이 바로 하지 않고 내 목소리는 조금씩 높아지자 신랑이 옆에서 한마디 해주었다. 마감시각을 주고 그때까지 하게 하라는 조언이었다. 책 여기저기서 많이 보았던 내용인데도 실생활에 적용하지 못하고 간과했던 부분이다. 홈스쿨링 안에서 지지고 볶는 나는 놓치기 쉽지만 옆에서 지켜보는 신랑에게는 보이는 것이다.
셋째, 이러한 부분 외에도 가장은 전체적인 방향을 보고 조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가장의 조언을 기꺼이 받아들이자.
홈스쿨링의 실제를 살아내다 보면 순간순간에 매몰되어 고군분투하기 쉽지만 전체를 조망하는 가장이 한 두 마디 건넬 때 엄마는 시선을 들어 올려 더 멀리 내다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학습보다는 관계에 집중했으면 좋겠다, 엄마가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에게 큰 축복이다 와 같은 한 두 마디가 그러하다. 너무 힘들 때는 그러한 말들이 쉽게 던지는 말 같고 와닿지 않을 때도 있다. 하지만 그 한 두 마디 말들을 귀하게 붙들 때 그 한 두 마디에 불과한 말들이 고군분투하는 엄마를 자유롭게 한다. 가장의 권위에 순종할 때 자유함을 누리게 되는 것은 가정을 다스리시는 주님의 섭리다. 어떻게 보면 스스로 총대를 메지 않는 자유함이라고 볼 수 있지만 또 어떻게 보면 주님이 가정 안에서 엄마에게 정해놓은 자리와 경계를 지킴으로써 주님이 예비해두신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어떤 때는 아이에 대해선 내가 더 잘 알지 가끔 한 번씩 보는 아빠가 뭘 알겠어 할 수도 있다. 객관적으로 볼 때 분명히 그러한 면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에베소서 5장 24절)"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의 뜻이 이해되지 않을 때 가장 아름다운 순종을 할 수 있듯이 남편의 뜻에도 그리스도에게 하듯 복종하라고 하신다. 물론 남편은 주님이 아니라 사람이다. 그러나 아내가 조건을 따지지 않고 순종할 때 주님께서 남편의 권위를 세우신다. 가타부타 말하지 않고 기꺼이 순종할 때 결국 모든 상황이 남편이 옳았음을 증명해준 적이 많다. 남편의 말이 원래 옳았고 내가 사태를 파악하지 못했던 것인지, 아니면 남편의 권위 안에 들어가니 주님께서 일하신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내가 순종하는 일을 통해 주님께서 남편의 권위를 세우신다는 것이다. 물론 범사에 남편이 옳았다는 결론이 난 것은 아니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 남편이 옳지 않았다고 생각되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순종의 자리를 지켰으니 언젠가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 일이었다고 고백하게 될 것이다.
성경은 주님이 만드신 가정의 설계도 그 자체다. 가정을 경영할 때 내 안에 말씀이 없으면 안 되는 이유다. 말씀대로 가정을 경영해야 홈스쿨링이 잘 굴러간다. 남편에게 순종하라, 아내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 집에 앉았을 때든지, 길을 갈 때든지 자녀에게 말씀을 강론하라(talk about). 너무나 분명하게 나와있다. 남편의 권위에 순종하는 일이 그래서 중요하다. 그리고 그러한 맥락에서 우리 가정의 홈스쿨링을 남편의 시각으로 감독받는 일은 지치지 않고 홈스쿨링을 지속해 나가는 것에 큰 유익을 준다.
'남편의 권위'라는 글감을 정하고 한참 동안 글을 시작하지 못했다. 주님의 시간표가 있겠지 하고 기다렸다. 그런데 유익하기 때문에 순종하고 말씀에 적혀 있으니까 순종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를 사랑해서 순종하듯 남편을 사랑하기 때문에 순종하라는 마음을 주신다. 바로 스마트워치 해프닝을 통해서.
남편이 아이들에게 스마트워치를 사준 일이 못마땅했다. 그러나 남편의 권위 아래에 들어가고자 한, 한 톨도 안될 순종에 주님이 빛으로 임해주셨다. 왜 그렇게 스마트워치를 아이들에게 사주고 싶어 하는지 남편의 뜻을 물어봤을 때 남편이 마음의 문을 열어 보였다. 남편은 한참 예민할 사춘기 시절을 IMF와 함께 보낸 세대이다. 사고 싶은 것이 있어도 가정 형편을 생각해서 꾹꾹 참으며 청소년 시절을 지나왔다. 남편은 그 시절의 감정들을 우리 아이들의 모습에서 다시 한번 느꼈다. 교회 형들이 손목에 낀 스마트워치를 우리 아이들이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모습이 신랑의 눈에는 자신의 어린 시절 모습이었던 것이다. 신랑이 그 마음을 나에게 열어 보였다. 그리고 신랑의 담담한 고백에 내 마음의 빗장도 열렸다. 나는 남편의 말에 순종하려고 애쓰는데 아내로서, 엄마로서의 내 권위는 왜 존중해주지 않는가 하는 마음이 잠잠해졌다. 옳고 그름을 따지며 왜 아이들에게 필요하지 않은 것을 사주나 하는 목소리도 사그라들었다. 그런 이유라면 얼마든지 사주세요 하는 마음이 들었다. 남편의 어린 모습이 진심으로 긍휼히 느껴졌고 사랑으로 품어졌다. 사랑하기 때문에 신랑의 뜻에 기쁘게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었다.
순종은 권위적인 것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따르는 것이다. 그래서 순종은 강압적인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것이다. 아내와 남편의 관계가 외롭지 않고 아름답기를 바란다. 그래서 가정과 홈스쿨링이라는 열매도 아름답게 맺히기를 축복하는 마음으로 글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