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스쿨링이 즐겁지 않다면
집에서 지지고 볶으며 홈스쿨링 하느라 고군분투하는 동료 엄마들에게 힘이 되고 싶어 글을 쓰기 시작한 지 서너 달이 지났다. 7-8여 년을 가정보육인 듯, 홈스쿨링인 듯 버텨오며 무수한 질문들이 쌓였다. 책을 뒤지며 그에 대한 답을 찾고 찾다가 찾을 수가 없어서 직접 주님께 여쭤보며 글을 써 내려갔다.
첫 글이 '엄마의 시간'이었다. 첫 글 이후로 주님께서 발견하게 하신 소소한 것들로 차곡차곡 써 내려갔다. 새벽에 쓰기도 하고 아이들을 모두 재운 후 밤에 쓰느라 새벽 루틴이 엉망이 되었던 시간들도 있었다. 어떤 때는 아이들은 아빠에게 맡기고 시도 때도 없이 글을 써대기도 하다가 점차 글쓰기가 새벽 루틴으로 자리 잡혔다. 새벽에 글을 쓴다고 해도 이미 자리 잡은 다른 루틴들도 있어서 시간을 길게 내봤자 3-40분. 매일 3-40분씩 써 내려간 글들을 일주일 동안 모아 한 편의 글로 발행한다. 일주일에 두 편은 그래도 써야 되지 않을까, 더 글을 써야 하는 것은 아닐까 온통 글쓰기에 사로잡혔다. 어떻게 하면 좀 더 틈틈이 글을 쓸까 하는 생각에 틈만 나면 브런치 서랍을 열었다. 하지만 하루 동안 내게 글 쓰는 시간을 허락하신 시간은 새벽의 3-40분 딱 그 정도의 시간이었다. 더 욕심내지도, 게으르지도 않게 하신 걸음이 내게는 딱 그 정도다. '아직은' 그 정도인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딱 그 정도만 매일 걸어내라고 하신다.
하루 동안 그 정도만 걸으라고 걸음의 분량을 정해놓으신 것은 내가 지켜야 할 자리를 헷갈리지 말라는 주님의 뜻이다. 매일 3-40분이라는 그 감질나는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으실 때도 있다. 은근한 욕심이 머리를 들어 올리려고 할 때 고개를 다시 숙이게 하시고 10분이라도 글 쓰게 하신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게 하신다.
첫 글로 엄마의 시간을 이야기한 이유는 엄마의 영혼육을 돌보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을 주님께서 어떻게 깨닫게 하셨는지 제일 먼저 나누고 싶었다. 너의 영혼육을 채우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 나와의 관계를 돌보는 일뿐만 아니라 너의 정신적인 필요, 육체를 돌보는 일까지도 균형 있게 필요하다. 많은 시간이 드는 일이 아니다. 조금씩 꾸준하기만 하면 된다. 나와의 관계가 채워져 있다면 다른 것들은 조금씩 꾸준한 한걸음 한걸음만으로도 충만히 채워질 수 있다고 가르쳐주신 일을 글로 풀어냈다. 글을 쓰기 시작할 즈음 가장 극적으로 가르쳐주신 일이기도 했다. 나에게는 육아의 일상 가운데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구원과 같은 일이었다. 육아라는 광야의 시간 가운데 나를 살리시고 지키신 은혜였다.
엄마의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해도 괜찮은 이유에 대해 이야기하고, 여러 변수들 때문에 더 부족해져도 아이들과의 관계라는 더 우선순위의 가치를 선택하며 하루를 보냈다면 괜찮다고 주님이 풀어주신 글로 나 자신을 위로하고 설득하는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지금 다시 엄마의 시간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일요일 오후 약속이 있어서 훌쩍 나간 신랑이 아이들이 다 잠들고 나서야 들어왔다. 나는 1-2시간 외출이 쉽지 않은데 하는 생각으로 다음날까지 저기압 상태에 들어갔다. 내 시간 타령을 할 때에는 늘 같은 레퍼토리다. 신랑과 비교하며 왜 나만 이래야 해, 나만 왜 내 시간 없이 이렇게 살아야 해. 엄마의 시간에 대해 주님께서 발견하게 하시고 글로 풀어주시고 나 자신이 설득되었을 때도 있었지만 그 주기만 길어졌을 뿐 정기적으로, 또는 터질 계기만 생기면 시간 타령에 들어가는 것이다. 근본적인 것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 되풀이되는 것이었다. 기상시간을 앞당기면서까지 시간을 더 확보해도 끊임없이 더 원하고 시간 결핍을 느끼게 하는 원인은 따로 있었다. 내가 부르신 자리를 벗어났기 때문이다.
나를 부르신 곳은 아이들 곁이었다. 엄마라는 자리였다. 엄마의 개인 시간에 대해 홈스쿨링을 하시는 지인분께 조언을 구한 적이 있다. 엄마 개인 성향에 따라 다를 것 같다, 엄마가 개인 시간을 갖는 것을 통해 힘을 얻으시는 분이 있다, 남편분의 도움을 통해 시간을 확보하시라는 조언을 얻었다. 조언을 들었을 당시에는 큰 인사이트가 없었다. 그런데 나를 부르신 자리를 명확히 하게 되자 그때의 조언이 다시 곱씹히는 것이다. 엄마가 개인 시간을 갖는 이유는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을 돌볼 힘을 얻기 위해서다.. 엄마의 영혼육을 돌보기 위해서는 그렇게 큰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조금씩 꾸준하기만 하면 된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시간 결핍을 느꼈던 것은 주객이 전도되고 욕심이 들어와서이다. 나에게 개인 시간을 주신 이유는 홈스쿨링을 더 잘 경영하고 아이들을 더 잘 돌보기 위한 힘을 얻게 하시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새벽 시간에 주님과 교제를 하고 또 글을 쓰는 것이다. 그 시간에 얻은 힘으로 일상을 꾸려나가기 위해.
잘 일하기 위해 쉰다는 말을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았다. 잘 쉬기 위해 성실하게 일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르심의 자리에서 보면 어쩌면 부르신 자리를 잘 지키기 위해 쉬는 시간을 잘 활용하는 것이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엄마의 자리로 부르심 받은 내가 개인 시간을 통해 힘을 얻고 그 힘으로 아이들을 잘 돌보고 또한 잘 돌본 그 시간들이 쌓여 여러 방면의 열매가 맺혀 가는 것이다.
어떻게 하다가 부르심의 자리를 다시 묵상하고 우울감에서 벗어나게 되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기도의 자리에서 받은 은혜 덕분일 것이다. 잘 일하기 위해 쉰다는 마음이 자리 잡히고 근본적인 것이 해결되자 시간 타령으로부터 구원받았다. 아이들을 돌보면서도 책 한 줄이라도 읽고 싶은데 하는 마음으로 아이들을 옆으로 제쳐놓는 일 또한 기꺼운 마음으로 내려놓게 되었다. 결국 책 한 줄 읽음도 아이들을 잘 돌보기 위해서인데 라는 생각으로 내게 주신 이정표를 확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제는 오랜만에 신랑에게 세 아이를 맡기고 카페로 나왔다. 신랑도 피곤하게 일하고 쉬는 날인데 나 혼자 쉬자고 나와도 되나 하는 마음으로 늘 미루고 또 미루고 참아왔다. 나가기 전까지도 한 명이라도 데리고 나가야 하나 하는 고민을 했는데 결국 혼자 나가라는 신랑의 말에 쭈뼛쭈뼛 혼자 나왔다.
책 몇 장 보고 글 한편을 발행하고 길어진 머리도 짧게 자르고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볍다. 몇 년 전 신랑에게 두 아이를 맡기고 나왔을 때에는 카페에서 혼자 책을 읽다가 돌아와도 그때뿐이고 그 다음날 다시 육아의 현장에서 도돌이표를 찍고 있었다. 내가 왜 혼자만의 쉬는 시간을 갖고 오는지 그 방향성이 명확해진 지금은 조금 다른 것 같다. 오늘의 재충전은 우리 아이들을 위한 것이고, 신랑을 위한 것이다. 물론 엄마인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들도 행복하다는 말을 참 싫어했다. 엄마의 이기심을 좋게 포장한 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말의 본질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 요즘이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내가 행복해야겠다. 내가 왜 쉼을 누리고 힘을 얻고 행복해야 하는지 방향성을 명확히 할 일이다. 부르심의 자리를 벗어나지 않는 한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들도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