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고군분투하는, 사랑하는 엄마들에게
공모전이 뭐라고 그간 써왔던 글을 다듬느라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 퇴고만 일주일을 하던 즈음 마음이 공허해지는 것이 느껴진다. 내가 글쓰기를 정말 좋아했던가 하는 생각도 스멀스멀 올라온다. 무슨 일이든 꾸준히 하지 않으면 스스로를 의심하게 되는 것은 자명한 일인가보다.
연휴가 끝나고 신랑이 없는 아침이 오랜만이다. 아이들과 지지고 볶는 일상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저 일상이려니 하고 받아들이면 좀 괜찮아질지 모르겠지만 아직도 벗어나고자, 해결하고자 고군분투하느라 화가 난다. 아침부터 싸워대는 아이들에게 화를 냈다. 그리고 그다음엔 아이들의 하이퍼 2연타. 아들 둘이 아무 이유 없이 분위기가 업되어서 뒹굴고 난리다. 도저히 진정시킬 수가 없어 슬그머니 혼자서 복층으로 올라가 보았다.
주일 말씀이 노아의 방주에 대한 것이었다. 노아는 백이십여 년 동안 방주를 지었다. 노아와 온 가족을 구원하게 될 방주라곤 하지만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환경에서 자그마치 백이십여 년 동안이라니. 나는 어떤 방주를 짓고 있냐고 물어오셨다. 그것이 너의 구원을 위한 일이란 것을 믿느냐고 물어오신다. 그 질문 앞에 이 가정, 이 아이들과의 일상이 나를 구원할 방주라니! 하는 한숨을 답으로 드렸다. 그만큼 요즘이 힘들었다. 눈물 섞인 마음으로 엎드려서 기도하는데 "이 집의 주인은 이미 바뀌었다."라는 마음을 주신다. 작년에 이사 온 이곳에서 전주인은 어땠을까, 이 집은 어떤 소리를 들으며 지내왔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하곤 했다. 그런 생각을 이제 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런데 마침 금송아지 말씀으로 기도를 하던 중이었다. 도대체 모세가 사십 주 사십야를 시내산에서 안 내려오는데 금송아지 안 만들고 어떻게 배기냐고, 난 우상 안 만들 노력을 못하겠다고 항의를 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이 집의 주인은 이미 바뀌었다니. 네가 아니라 내가 한다. 네가 우상 숭배하지 않도록 내가 그렇게 만들어줄 것이라고 하신다. 주님이 주인이시라고. 그러니 주님만 의지하라고.
눈물이 쏟아졌다. 내 열심이 아니라고 하셨다. 주님의 열심으로 내가 우상을 의지하지 않게 하실 거라고. 주님께 이렇게 나아오기만 하면 된다고 하신다. 이사 오기 전에 살던 집에서는 아이들이 놀 때 아이들 바로 옆에서 한 시간씩 울며 불며 기도드린 적이 있었다. 아이들이 노는 공간에서 불과 한두 걸음 떨어진 곳이었는데 그 정도의 거리감인데도 아이들과 떨어진 느낌, 내 예배공간이 확보된 느낌이 들어서 참 신기했다. 그 한두 걸음 떨어진 곳에서 나만 있는 것처럼 개인 예배에 온전히 집중하곤 했다. 외곽으로 이사 온 이곳은 그전에 살던 집보다 넓어졌는데도 왜 그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을까 의문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야 의문이 풀렸다. 그 거리감은, 그 거리감으로부터 느낀 해방감은 주님을 의지할 때 주님으로부터 온 감각이었다. 거리와 공간이 문제가 아니라 주님을 의지함이 열쇠였다.
이 단순한 진리 하나 배우는데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린다. 주님을 의지함이 열쇠인 육아의 시간은 그래서 온전히 광야를 걷는 시간이 맞나보다. 주님과 동행하고,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을 훈련하고 또 시험하시는 시간. 그래서 육아의 시간은 나를 구원할 방주를 지어내는 시간이 맞나보다. 이 시간 때문에 결국 홍수의 때에, 심판의 때에 나와 온 가족을 지켜낼 것이 믿어진다.
지치지 않고 롱런하는 홈스쿨링을 위해 쓰기로 계획해둔 글감은 이미 다 썼는데 아직도 쓸 것들이 계속해서 나오는 것은 우리의 경주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아이들이 장성하여 출가한 시점에서도 자녀와 가정에 대한 이 글감을 계속 붙들고 있진 않을까 싶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아이들과 고군분투하는 엄마들이 참 사랑스럽고 애틋하고 존경스럽다. 마치 애들 다 키운 권사님이라도 된 듯한 말 같아서 민망하긴 하지만 그래도 엄마들이 참 좋다. 엄마들을 향한 사랑하는 마음을 좀 더 붙들고 쓰지 못한 글들이 아쉽다. 고군분투 끝에 걸어낸 이 작은 걸음들이 다른 엄마들에게도 한걸음 나아가게 하는 힘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