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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새벽 Nov 03. 2024

우물은 터진다.

“나는 오늘도 너에게 화를 냈다” 한 구절

 어느 주말 아침, 예고도 없이 물이 나오질 않는다. 아래층 아저씨도 물이 나오지 않는다고. 관리사무소는 토요일이라 연결이 되지 않고. 이럴 때는 맘카페! 얼른 들어가 올라오는 글을 보니 oo동 일대 전체가 갑작스러운 단수에 우왕좌왕 중이다. 공사 도중 급수관을 건드려서 터졌는데 복구 중이란다. 근데 꽤 큰 관이라 언제 복구할 수 있을지 안내가 불가능이라는 안내? 에 속 터져하는 글이 속속 올라오고 있다. 마침 우리 집은 교회 사랑방 식구들을 저녁에 집으로 초대한 참이다.


 “어떻게 할까? 교회에서 모여야 하나?”

 집으로 초대하는 것이 늘 피곤하게 여겨진다. 막상 모이면 나눔과 교제가 참 좋지만 모임을 준비하기까지의 시간들이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은근히 교회에서 모임을 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었다.

 “벌써 카톡 올렸어.”

 결정을 미루곤 하는 신랑이 웬일로 밀어붙인다. 집에서 모임을 강행하기로. 물이 곧 나올 거라고. 내 입은 불만으로 삐죽 대지만 평소답지 않게 밀고 나가는 신랑의 모습에 잠잠히 따라야 할 것만 같다.


 모임을 바쁘게 준비하고 잠시 중간일정 때문에 외출하는데 신랑이 저기압이다. 오늘 중으로 복구가 안 될 거라는 안내를 방금 전해 들은 탓이다.



 어제 피곤한 눈을 지켜가며 한 권을 읽어냈다. 최민준 선생님의 ”나는 오늘도 너에게 화를 냈다 “ 엄마들 모임에서 책제목을 말하면 다들 웃음부터 터진다. 말 안 해도 다 안다. 나도 그렇고 옆집 엄마도, 애친구 엄마도 다 고단한 육아현실에서 온유한 엄마가 되고 싶어도 화는 계속 터지는 안타까움.


 오늘 갑자기 물이 끊어지면서 기도드릴 때 든 마음은 사랑방 모임 가운데 주님이 은혜의 생수를 부어주고 싶어도 흘러가는 관이 터지면 온전히 생수가 흘러가지 못한다는 마음이었다. 아이들에게 화를 내면 은혜가 누수되게 하는 일이니 모임 가운데 꼭 절제하기를 기도 중에 다짐했다. 우리 집에는 손님들이 오시면 유난히 더욱 텐션이 올라가는 아들 둘이 있는데 손님 중에 좋아하는 형이 와서 합류하기로 되어 있다. 세 아들들이 저번 모임에서 집안을 어떻게 해놓았는지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오늘은 은혜의 생수가 흘러가는 관이 터지지 않도록 꼭 화를 참으리라.


 손님들이 오고 어른들이 한참 모여 교제를 나누던 중 아이들이 노는 공간으로 가봤더니 의외로 너무 잔잔히 놀고 있다. 남자아이들이라 어느 정도의 소란스러움은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음식물 파편들이 바닥에 흩어져 있지 않고 집안 물건들도 대부분 제자리다. 아이들이 많이 컸구나 싶다.


 모임은 마쳤지만 여전히 물은 나오지 않는다. 손님 중 한 분은 집에서 자고 가겠다고 하는데 씻을 수가 없다. 대충 아이들을 닦여서 재우고 신랑과 함께 성경말씀을 읊조리는데 꾸룩꾸룩 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드디어 물이 나온다. 아침에 끊어진 물줄기가 자정이 되자 콸콸콸 터져 나온다.



 사랑방식구들에게 기도를 부탁하며 저녁 내내 함께 예배를 드렸다. 함께 우물을 파는 작업을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우리 집에 생수가 솟아나도록 우물을 파주시러 왔구나. 나는 손님들 온다고 피곤한 마음이었는데 우물을 파주시러 오신 분들이었구나. 그런 생각을 하던 즈음 내 입술에서 내가 한 말이 아닌 것 같은 말이 튀어나왔다.

 “우물은 아이들이 판 거야. “

 오늘은 아이들이, 글을 모르는 다섯 살 막내까지 세 아이가 시편 150편을 통독한 날이었다.


결국 교육은, 아이를 뜯어고치는 일이 아니라 아이와 시간을 잘 흘려보내는 일에 가깝습니다.
- “나는 오늘도 너에게 화를 냈다.”, 최민준


 내가 화내지 않기 위해 무슨 일을 했나 생각해 보면 내가 한 일이 없다. 그저 아이들이 자라 있었을 뿐이다. 나는 눈으로 아이들의 성장을 확인했을 뿐이다. 내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아이들을 뜯어고치려고 애를 쓰며 아이들의 마음을 노엽게 했는지. 최민준 선생님의 남자아이들에 대한 책들은 그래서 좋다. 나의 이런 날카롭고 아찔한 마음에 “지금 그걸 꼭 뜯어고쳐야 해?”, “남자애는 원래 그래.”, ”그건 스킬이 아니라 시간이 필요한 영역이야. “라는 말들을 들려준다. 그렇게 안 해도 돼, 내가 너를 그렇게 기다렸어. 내가 너를 이해하고 또 오랫동안 기다렸어, 딸아. 하는 아버지의 음성으로 들린다. 사랑받는 남자아이들의 모습에서 내가 사랑받는 것 같은 위로를 느낀다.



 우물을 하나 파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이야기로 들어왔다. 우물 하나를 파면 큰 재산을 확보한 것과 같이 든든한 일이고 또 그 우물로 그 일대의 많은 사람들, 생명들이 살아난다. 그래서 예배는 그렇게 영적 우물을 파내는 일과 같고 또 파낸 우물에서 생수를 길어 올려 마시고 영혼들이 살아나는 일과 같다. 사랑방 식구들이 모여 하나의 우물을 터트리기 위해 애를 쓰는 동안 아이들도 시간은 걸려도 천천히 같은 우물을 파내고 있었던 것 같다. 화내지 않으려면 엄마인 나만 고군분투하며 힘써야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이들도 자라고 있었다. 그 시간은 반드시 만난다. 오늘 다시 우물이 터진 것처럼. 아이들이 잘 자랄 수 있도록 아이들과의 시간을 잘 흘려보내는 엄마의 걸음을 결코 무겁지 않게 하신 그분의 섭리에 눈물이 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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