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보고 자란다고?

내가 연약해서 홈스쿨하면 안 될 것 같아요

by 푸른새벽

“아빠, 머리 좀 가만히 있으라고.”

막내딸아이가 아빠 머리를 묶어준다며 아빠를 앉혀놓았다. 아빠의 짧은 머리를 묶어보겠다고 몇 번씩 저런 말을 하더니 칭얼대며 드러누워버린다. 문득 내가 머리를 묶어줄 때 가만히 있질 못하는 아이에게 신경질 내던 대로 그대로 따라 하나 싶다.


첫째 아이는 아직도 엄마를 옆에 두고 잠들고 싶어 한다. 아이 옆에 누워있는데 아직 잠이 오지 않는 둘째와 막내는 나란히 누워 웃고 떠든다.

“조용히 좀 해. “

졸린 첫째가 나지막이 불평하지만 피곤해서 누웠을 때 떠드는 아이들에게 화를 내는 내 모습 그대로이다. 내 예민한 부분을 아이가 그대로 답습하는구나 싶어서 미안해진다.



홈스쿨링을 하다 보면 내 모습 그대로 따라 하는 아이들을 보며 미안하고 걱정이 올라오는 순간이 많다. 학교에 보내서 나보다 훌륭한 선생님과 때로는 훌륭한 또래에게서 보고 배우게 하는 게 더 나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의 단점이나 인간적인 연약함을 보고 배울까 걱정하는 것이 아니다. 부모 자녀 간에도 서로 거리를 유지할 때는 쉽게 나오지 않는 부모의 민낯이라는 것이 있다. 학교라도 보내서 어느 정도 떨어져 있는 시간이 확보되면 내 밑바닥을 아이들에게 감출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24시간 근무상태인 듯 아닌 듯 지내다 보면, 아이들의 연약함과 나의 연약함이 계속 부딪치며 생채기가 나곤 한다. 그러다가 짜증이 폭발하거나 화가 잘 가라앉지 않아서 씩씩대는 민낯을 그대로 보여줄 때가 많다.


상황이 그 지경까지 가다 보면 ‘주님, 이러다가 제가 애 망치는 거 아닐까요? 홈스쿨링하는 게 오히려 아이에게 해를 끼치는 건 아닐까요?’하는 걱정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그때마다 ‘딸아, 내가 한다. 나는 엄한 주인이 아니란다.‘ 하시며 은 한 므나를 수건에 싸둔 종의 이야기를 생각나게 하신다. 주인을 엄한 주인으로 오해하고 주인이 맡겨둔 므나를 묵혀둔 종. 네가 그 종처럼 아버지를 오해하고 있다고 말씀해 오시는 것이다. 아이들의 자람에 대해, 아이들의 믿음에 대해 너에게 전적인 책임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해 오신다. 나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오직 충성, 자라게 하시는 분은 아버지라고.



아침마다 사도행전을 읊조려 읽고 있다. 베드로와 제자들이 많은 사람을 고치고 또다시 살려낸다.

“그 일이 온 욥바에 알려지니, 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게 되었다.” (행 9:42)

베드로가 죽은 도르가를 살린 일로 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게 되었다고 말씀하신다.

“그것은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 사람이 떨어져 나가서, 예수를 믿었기 때문이다.” (요 12:11)

그런데 죽은 자를 살리고 많은 사람이 믿게 된 일은 제자들보다 주님이 먼저 행하시고 보이신 일이라는 것을 묵상하다가 울컥하게 된다.


주님이 살아오신 대로 살아내는 제자들처럼 나도 주님을 보고 들은 대로 살아내야겠고 내가 그렇게 주님 따라 살아가는 대로 내 아이들이 그대로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감동이 들었다. “내가 한 것을 너희도 하리라” 하셨던 주님 말씀처럼 부모인 내가 한 것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한 것을 우리 아이들이 그렇게 하며 살아가겠지 하는 감동이다.



주일 오후 주일학교 교사 모임이 있었다. 여름성경학교를 준비하는 회의를 간단히 하고 기도를 하는데 전도사님과 집사님이 무릎을 꿇으시는 것이다. 조용한 곳을 찾아 자모실에서 모였던 터다. 나도 얼떨결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시작하는데 성령님이 부어주시는 감동에 주체가 안돼 눈물이 쏟아졌다. ‘이런 것이 믿음의 본이구나, 우리 주일학교 아이들이 보고 자라는 것이 이러한 것이구나.’하는 감동에 한참을 울었다.


교회도, 주일학교도 많이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다. 전도사님과 집사님들께서 어떻게 믿음으로 돌파해 나가시는지 보고 있다. 조금 머리가 큰 아이들은 어른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어깨너머 들으며 교회가 어떻게 돌파해 나가는지 보고 배우고 있을지 모른다.



첫째 아이는 수시로 눈을 감고 기도하곤 한다. 아이의 기도제목은 대략 이런 것이다. ‘주님, 제가 좋아하는 과자 1+1 이게 해 주세요.’ 편의점 들르기 전의 짧은 기도다. ‘주님, 볼에 난 뾰루지가 여드름이 아니게 해주세요.’ 운동을 시작하고 땀을 많이 흘리는 아이가 때가 이르게 뾰루지들이 올라오고 있다.


막내딸은 바닥에 어질러져있는 물건들을 열심히 자기가 기억하고 있는 자리에 집어넣으며 재미있어한다. 가끔 아빠물건이 오빠들 서랍에서 나오기도 하는 것은 정리를 좋아하지만 아직 2프로 부족한 딸의 솜씨다.


둘째 아이는 목소리가 크다. 주일학교 예배팀으로 섬겨 예배 10분 전이면 교회 구석구석으로 “어린이공동체 예배 10분 전입니다!” 외치고 다닌다.


모두 내 모습이다. 염려가 많아서 수시로 기도하는 것도, 정리벽이 있어서 바닥에 물건들이 널려 있는 것을 못 참아하는 것도, 귀가 약해서 유난히 목소리가 큰 것도 모두. 분명히 내 연약한 모습들이지만 믿음의 눈으로 보면 이런 나를 용납하시고 다듬어 쓰시는 주님의 모습이 보인다.


모두 하나님이 하신다. 주님이 하신 일을 나도 하게 하시고 내가 한 일을 또 아이들이 하게 하실 것이다. 내가 잘난 것을 아이들이 배우리라는 기대가 아니다. 나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열심이 나를 향해 일하시고 또 아이들에게 일하실 것이라는 믿음이다. 내가 주님의 열심으로 자라 가는 것을 우리 아이들이 보고 배울 것이라는 기대이다.



아이들이 부모를 보고 자란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기도 하면서 어쩌면 기대되는 일이다. 내 민낯까지 모두 보여도 주님께서 나를 용납하시고 어떻게 빚어가시는지 아이들이 보고 있다. 내 모습을 닮은 아이도 그렇게 자신을 용납하시고 인도하실 주님을, 부모의 삶을 통해 먼저 만나고 자신의 삶을 통해 다시 만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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