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와 함께 하는 시간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요한복음 14장 21절)라는 성경 말씀이 있다. 왜 계명을 지키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되는 건지 한 번도 기도 가운데 여쭤본 적이 없었다. 묻지 않았던 것은 내 안에 답이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내 안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여쭤보게 하시나 보다.
가정 예배 중에 문득 기도로 여쭤보았다. 왜 계명을 지키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건가요 여쭤보니 선악과가 생각나게 하신다. 선악과가 아니라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은 자발적인 사랑의 표현이었다. 그처럼 '선택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라는 응답을 주신다.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의 계명대로 살길 선택하는 것은 나 자신을 선택하지 않고 주님을 선택하는 것과 동일하다. 그렇게 사랑의 선택이 쌓이면서 주님과의 관계가 돈독해지고 두터워지며 그것은 결국 관계를 지키는 성벽이 된다.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사랑하는 자인 이유다.
그제야 가정 예배를 함께 드리고 있는 우리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얼마나 나 자신이 아니라 우리 아이들을 선택해왔는지, 아이들을 선택하는 자리를 얼마나 적극적으로 지켜왔는지 돌아보게 된다. 앞선 글 '엄마의 시간'이라는 글이 조금 부끄러워지는 지점이다. 엄마의 시간이 아니라 '자녀와 함께하는 시간'에 대한 글이어야 했는데 아직 내 안에 그것에 대한 글감이 충분히 쌓이지 않았다는 것이 부끄러워진다.
사실 자녀와의 관계에 대한 답은 이미 오래전에 주셨다. 자녀와 함께 하는 자리가 주님을 만나는 자리라고 누누이 말씀하셨다. 그 자리에서 아버지께서 나를 어떻게 사랑하시는지 알게 되고 누리게 될 것이라고. 어떻게 육아를 누리나요? 어떻게 자녀를 누리죠?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서야 가능한 일 아닌가요? 수없이 기도로 여쭤왔다. 자녀를 복으로 주셨다면 자녀를 누리게 해 달라고. 그에 대해 주신 응답은 늘 자녀와 함께 하는 자리를 지키라는 것이었다.
내 시간이 아니라 자녀와 함께 하는 시간을 의지적으로 선택한 적이 있다. 한참을 아이 옆에서 놀아주다가 순간 울컥했다. 아버지가 나를 이렇게 선택하셨구나. 나와 함께 있는 것을 선택하시고 즐거워하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나는 그저 순종하는 마음으로 자녀와 함께 하는 자리를 선택했을 뿐인데 그 자리를 통해 내가 받고 있는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게 하신다.
주님은 오늘도 내 시간이 아니라 자녀와 함께하는 시간을 선택하라고 하신다. 선택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고, 자녀와의 관계를 지키는 성벽이며,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키는 성벽이 되기 때문이다. 자녀를 선택하는 것을 통해 나를 선택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알게 하시고, 나를 참을 수 없이 기뻐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앎으로써 나 또한 자녀를 그렇게 기뻐하게 하시는. 아버지의 신비한 섭리를 되뇌고 또 되뇌인다.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스바냐 3장 17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