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문제
글감은 보름 전에 이미 정해놓았다. 미리 써놓은 글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지치지 않고 롱런하는 홈스쿨링을 위하여”라는 제목을 정해놓고 10개 정도의 글감을 뽑아놨다. 아니다. 글감이랄 것 까지도 안 되고 소제목 수준의 목록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무슨 생각으로 며칠 전 발행한 글 말미에 다음 글은 ‘엄마의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겠다고 덜컥 예고를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 되겠지 하고 가볍게 생각했는데 초고를 쓰기 시작하면서 오랜만에 감정의 풍랑을 겪었다.
내 일상이 이런데 누구한테 뭘 조언하는 글을 쓰나 싶은, 정체성에 대한 공격이 마구 들어온다. 예수님도 광야에서 시험당하셨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하고 말이다. 어차피 내가 쓰고 싶어서 쓰기 시작한 것도 아니고 주님이 이제 쓸 때가 되었다며 부르셨고, 얼떨결에 작가 심사까지 통과한 것도 주님이 하신 일이라면 주님이 글을 풀어주시겠지 하고 마음을 다스려본다. 내가 잘나서 쓰게 하신 게 아니라 내 연약함을 가장 빛나는 글감이 되게 하신다고 약속하셨으니.
아들, 아들, 세 살배기 막내딸까지 세 아이와 홈스쿨링 중인 엄마다. 첫째가 올해 여덟 살이니 햇수로 8년 차 홈스쿨러인 셈이다. 다음 세대 교육에 대한 부푼 꿈을 안고 초등 교사로 근무하다 첫 아이를 출산하면서 휴직했고 이번엔 자녀 교육에 대한 부푼 꿈을 안고 홈스쿨링을 하게 되었다. 정말 부푼 꿈이었는데 둘째가 생기면서 점점 이게 맞나 싶다. 조금씩 풍랑이 일기 시작했다. 정말 잔잔한 바다였는데 말이다.
첫째 아이가 쌀을 거실에 쏟아놔도, 폴더 매트 사이사이로 빵 부스러기를 흘려놔도, 싱크대 앞 대야에 담긴 물로 한바탕 물장난을 쳐서 물바다를 만들어놔도 허허 하곤 하는, 여유가 태평양인 엄마였다. 그런데 둘째가 생기면서 화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이다. 화 좀 내면 어때 할 수 있지만 화를 내는 내 모습이 힘들고 화를 오롯이 받아내야 하는 아이들의 모습에 또 괴로웠다. 그렇게 몇 년간 분노의 문제와 싸우면서 나의 오랜 기도 제목은 온유한 엄마가 되는 것이었다.
화를 안 내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애써봤다. 화에 대한 책들도 읽어 보고, 괴로운 심정으로 기도하기도 수년. 때로는 감정이 나쁜 것이 아니라 감정에 휘둘리는 것이 나쁜 것이라 생각하며 화나는 내 감정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을 안고 품어주려고 노력해봤다. 그럴 때면 일시적으로 감정으로부터의 자유를 느껴본 적도 있다. 성경 말씀을 암송하면 뭔가 결박같이 느껴지는 화로부터 해방받을 수 있을까 싶어 암송에 매진해봤다. 예수님과 동행하면 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예수 동행 일기도 수년간 써보았다. 하지만 그때마다 주신 응답은 화 안 내기 위한 수단으로 암송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암송하라는 말씀, 화 안 내려고 일기 쓰는 게 아니라 그저 예수님 바라보라는 말씀뿐 화내는 엄마로서의 모습은 여전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들을 데리고 합숙 수련회를 다녀왔다. 특별히 아이들을 돌봐주는 프로그램 없이 어른 프로그램에 그대로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었다. 그런 곳에서는 으레 사탕, 젤리 등의 간식이 풍성하게 준비되어 있다. 손주 귀엽다고 사탕을 한 아름 안겨주려는 시어머니와 거의 싸워가며 안 주려고 애썼던 것들인데 어린 둘째가 계속 한 움큼씩 가져왔다. 그대로 엄마 가방으로 집어넣고는 내일 먹자고 단속하기 바빴다. 한참을 눈을 감고 기도하는데 옆에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등을 보이고 몰래 엄마 가방을 뒤지는 둘째에게 다가가 이름을 부르는데 둘째가 화들짝 놀라더니 대성통곡을 했다. 내가 무슨 생각이 들어 그랬는지 “선물아 사탕 먹고 싶어? 먹어도 돼.”하고 둘째의 손에 사탕을 쥐어주었다. 둘째가 얼굴이 밝아져 사탕을 들고 가고 나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펑펑 울었다. 아이가 내 것이라고 생각하고 내 손에 꼭 움켜쥐고 있던 내 모습이 직시되었다. 아이의 고집이 아니라 내 고집을 꺾으니 그때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졌다.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하나님의 아이를 내 것인 양 내 틀에 끼워 맞추려고 했던 것을 한참 동안 회개하며 기도했다.
천국은 모든 사람이 성하고 완전한 곳이어서 천국이 아니라 어쩌면 모든 사람이 어떤 모습이어도 용납될 수 있는 곳이라 천국인 것은 아닐까 하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다. 아이와의 관계에서도 늘 그랬던 것 같다. 아이가 훈련되고 부모의 말을 잘 들어서 가정이 천국 같은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나와 다른 아이들을 용납할 때 늘 천국 같았다. 엄마로서 느끼는 내 감정, 특히 분노의 문제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내 손에 잘 안 들어오고 내 마음대로 안돼서 화가 나고, 이해가 안 되고 용납이 안돼서 화가 난다. 하지만 아이가 그렇지, 아기가 그렇지 뭐 하고 무한 용납이 되는 아가에게는 화날 일이 없다. 용납하면 천국이 된다.
아직도 나는 자녀와 함께 하는 일상에서 내 틀과 고집을 죽이지 못해 매일 아등바등 몸부림치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제자리걸음만큼은, 또는 뒷걸음질만큼은 결코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어제보다 오늘 한걸음 더 나아갔다고 말할 수 있는 하루로 올려드릴 것이다. 불완전한 진전이지만 오늘은 그 자체로 완전한 성취라고, 잘하고 있다고 격려해주면서. 내 감정을 바라보지 않고 언젠가 이루어질 홈스쿨링의 푯대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