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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관리하지 마세요

시간의 붕괴

by 푸른새벽

첫째와 도서관 데이트 중이다. 책을 좋아하는 첫째 옆에서 나는 책 4권을 읽어냈다.


데이트라고 이름은 붙였지만 같이 맛있는 거 먹는 것 외에는 각자 좋아하는 일을 한다. 근처 카페에서 첫째는 빙수 한 그릇, 나는 아이스녹차 한잔을 비운 후 자료실로 들어왔다. 첫째는 자기가 좋아하는 책들을, 나는 오늘 반납해야 하는 책 4권을 마감에 쫓기는 사람처럼 읽어 재꼈다.

도서관에 하루 종일 있었던 것은 아니다. 3-4시간 남짓 있었던 것 같다. 짧다면 짧은 시간 안에 4권을 읽어낼 수 있었던 것은 4권이 모두 같은 분야의, 비슷한 내용을 다룬 책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4권을 그 시간 안에?라고 놀라신다면 오늘 풀어낼 글의 문 앞에 잘 도착하셨다.



“목표를 달성하는 데 100가지 단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일을 한 번에 해냈을 때 우리가 알던 시간은 붕괴된다.”
-‘인생이 바뀌는 시간관리의 비밀’ 중에서


글 한 어귀를 인용하자니 책제목이 조금 쑥스럽다. 그래도 4권 중 가장 인상적인 책이었다. 그중에서도 인상적인 대목이다. 시간관리에 관한 책이 많고 또 우선순위에 따라 가지치기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도 많지만 시간관리에 대한 시선 자체를 바꿔주는 책은 흔하지 않다. 땅에 시선을 두고 있다가 고개가 하늘로 들어 올려지는 느낌이다.


시간관리를 잘하면 잘할수록 더 바쁘고 여유가 없어지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쉼 없이 이것저것을 바쁘게 해치우게 하는 시간관리법대로 살다 보면 더 정신이 없어진다. 그럼에도 시간을 한 방울의 한 방울까지 짜내어 쓰게 만드는 방식에 혹하는 것은 다른 방식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시선을 들어 올려야 한다.


저자는 이루고 싶은 삶의 모습이 있다면 미루지 말고 지금 그렇게 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지 생각해 보라고 한다. 내가 하고 있는 수많은 일로 도대체 뭘 하고 싶은 건지, 목표에 맞는 일인지 책을 읽는 내내 생각했다. 시간관리의 쳇바퀴는 우리에게 꿈을 이루려면 100가지 스텝을 통과해야 한다고 한다. 100가지 스텝을 부지런히 걸어내기 위해 시간을 잘 관리하라고 자꾸 부추긴다. 하지만 그 쳇바퀴에서 일단 벗어나면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스텝 자체를 획기적으로 줄여버리는 방법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알던 시간은 붕괴된다.


쉬운 예로, 돈 벌어서 가족과 단란하게 지내는 것이 목표라면 그냥 지금 단란하게 지낼 수 있다. 그 화목을 유지하기 위한 방어벽으로 돈을 버는 것인데 성을 짓는 것이 먼저인지 성벽을 짓는 것이 먼저인지 분간하지 못하면 헛된 달음질을 하기 쉽다. 가족부양을 위해 사업체를 늘리면서 가족 얼굴 볼 시간이 없어졌다는 이야기는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사업체가 궤도에 오르고 여유로워지면 가족과의 시간을 더 확보할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사업체가 궤도에 오르기 전에 그냥 지금 가족과의 시간을 확보하는 길도 있다. 그 100가지 스텝을 밟아내는데 10-20년이 걸린다면 지금 사업체를 최소로 유지하면서도 가족과의 시간을 확보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에는 2-3년이 안 걸릴 수도 있는 일이다. 정말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냈다면 지금 그렇게 사는 것이 시간관리의 쳇바퀴에서 나오는 것이며, 그것이 시간을 붕괴하는 방법이다.



오늘 아이 옆에서 책 4권을 짧은 시간 안에 읽어낼 수 있었던 것도 어떻게 보면 시간을 붕괴한 소소한 예이다. 물론 더 짧은 시간 안에 더 많은 책을 독파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나는 속독을 하는 사람도 아니고 평소에 그렇게 책을 빨리 읽는 편도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된 거냐. 같은 분야의 비슷한 내용을 다루고 있는 책 4권을 빌려놓고 이 책들을 통해 무엇을 얻고 싶은지 목적이 분명해지니 굉장히 빠른 속도의 발췌독이 가능해졌다. 다 읽어낸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다 읽어내야 놀라운 일이지 그게 뭐가 대단한 일이냐 하실 수 있지만 그게 놀라운 일이다. 반납일이라는 마감시간에 쫓기지 않고 한 권 한 권을 여유롭게 읽었다면 한 달이 걸려도 다 읽었을까 싶다. 그중에는 내가 완전히 이해하기엔 어려운 책도 있었다. 한 달이 걸려서 읽었으면 남는 게 더 많았을까. 더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한 달의 시간을 단 3-4시간으로 붕괴시킨 것이다.



세 아이를 홈스쿨링으로 키우고 있다. 첫째가 벌써 열한 살. 10여 년을 홈스쿨링 중인 셈이다. 홈스쿨링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많은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환상이 현실이 된 부분은 극소수다. 아침에 피곤한 아이들을 힘겹게 깨우지 않아도 된다는 것 정도. 그것은 이룬 게 아니라 저절로 된 것이니 제외하자. 홈스쿨링을 하면 아이들이 스스로 좋아하는 분야를 찾아서 ‘공부가 재미있어요!’하며 천재처럼 공부할 줄 알았다. 언제 그렇게 될까 언감생심 꿈만 꾸며 여전히 ‘보통 공부’를 해왔다. ‘공부가 재미있어요’가 아니라 ‘엄마 오늘은 쉬면 안 돼요?’ ‘학교 다니는 애들은 벌써 등교해서 1교시 시작했다 이눔아’가 일상이다.


그런데 언제 그렇게 될까, 이 공부가 끝나면 그렇게 될까, 저 공부가 끝나면? 할 것이 아니라 지금 그렇게 살면 되는데! 아이들이 유난히 힘겨워하는 과목을 떠올려보았다. 그 과목을 공부하는 목적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니 그렇게 어렵게 할 공부가 아니었다. 방식을 바꾸고 중복된 공부들을 정리하고 나니 ‘개인공부’ 블록을 넣을 수 있게 되었다. 공부하고 싶은 책을 정해서 매일 수첩에 끄적이는 것이다. 경제에 관심이 많은 첫째는 경제공부, 아직 갈팡질팡인 둘째도 형 따라서 경제 공부. 아이들 눈이 반짝거린다. 오랜만에 보는 반짝거림이다.



‘그래서 도대체 뭘 하고 싶은 건데? 그러면 지금 그렇게 살아!‘

이 단순한,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한 멘트가 사실 시간을 붕괴시키는 열쇠였다. 하루에 2-30분, 1-2시간 아껴서 어디다 쓰려고? 한 달, 아니 1-2년, 10년을 아껴야 시간 좀 아꼈네 할 수 있지. 그 정도는 아껴야 어디 쓸 수 있지 않겠어? 이제야 시간의 주인 자리를 되찾게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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