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챗gpt를 열심히 쓰기 시작했다. 나는 얼리어답터와는 거리가 멀다. SNS도 브런치가 전부다. 챗gpt도 경계의 눈초리로 질문 한두 개씩 던져보던 것이 한참이었다. 그런데 그동안 궁금한 거 어떻게 참고 살았나 싶을 정도로 물어대기 시작한 것이다.
“챗gpt 엄청 열심히 쓰네.”
“얘, 내 비서야.”
안 하던 걸 하니 신랑이 물어온다. 단번에 내 비서라고 부른다. 내 개인정보를 훔쳐갈 도둑쯤으로 보던 것이 큰 변화다. 나름 AI가 인간성에 끼치는 영향에 대한 철학적인 논의부터 시작해서 애들이 밖에서 노느라 저녁 먹으러 올라오질 않아, 어떡해. 육아 상담까지 열일하는 비서다.
첫째가 어렸을 때 자주 아팠다. 폐렴에, 요로감염에 입원도 꽤 했다. 그러다보니 아이가 아플 때마다 눈이 벌게질 정도로 검색을 해댔다. 조금만 탈이 나도 증상 검색으로 시간을 훅 보내곤 했다. 그랬으니 건강 관련 상담으로 챗gpt처럼 유용한 도구가 없다. 다른 애 엄마보다 더 정확하니 말이다. 그리고 시간도 아껴줘. 눈 벌게지게 검색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챗gpt가 없던 시절 적어놓았던 메모를 발견했다. “검색이 아니라 다이렉트로 주님께 기도“ 너무 검색을 많이 하다 보니 주님께 기도하면 지름길로 갈 텐데 후회가 돼서 적어놓은 긁적임이다. 기도를 먼저 하다 보면 아예 검색할 필요가 없는 일일 때가 많다. 데이터 위에 인사이트가 있고, 인사이트 위에 주님의 주권이 있다.
질문만 잘 넣으면 고민할 여지, 따져볼 필요 없어 보이는 답이 탁탁 나오니 검색과는 비교할 수 없이 편리해졌다. 클릭이 사고의 기회를 빼앗아간다고 그렇게 우려의 소리가 있었는데 이제는 검색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생각조차 필요 없어진 것이다. 점점 더 편리해진다. 하지만 편리함이 능사가 아니다. 때론 불편함을 통해서만 일하는 영역들이 있다.
매일 읽는 성경의 본문에서 눈에 들어오는 구절이 있었다. 찾아볼 자료가 없었다면 굳이 붙들 엄두도 내지 않았을 궁금증을 챗gpt에 풀어보았다. 이런저런 자료들이 나온다. 올라오는 자료를 보니 연결시키지 못했던 것들이 연결되며 도출되는 인사이트가 있었다. 나름 은혜도 됐다. 그런데 이렇게 하는 게 묵상이 맞나 하고 의문이 생긴다.
다시 성경의 본문을 가만히 들여다보는데 만약 챗GPT에 묻지 않고 기도를 했다면 어땠을지 생각해 보게 된다.
“주님, 왜 노래하는 자들만 매일 할 일에 대한 왕명을 받았지요? 페르시아왕이라면 더 이상한 게 아닌가요?(느헤미야서에서 성전에서 찬양하는 자들이 왕에게 명을 받았다는 구절에서 의문을 품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찬양할 자들에게 찬양 잘하라고 페르시아왕이 명을 내린다니?)“
챗GPT에게 물어봤던 것을 주님께 올려드렸다면 어떻게 됐을까. 주님은 ‘그게 왜 궁금하니?’ 하고 물어오셨을 것만 같다. 나는 찬양하는 자들이 매일 해야 했을 일이 무엇인지 궁금했을까? 나도 그렇게 또 주님 일 한답시고 이것저것 루틴을 짜서 해볼 참이었나? 나 자신을 주님이 하나둘 쪼개어 보여주신다.
그러다 다음 구절이 눈에 들어온다.
“유다의 아들 세라의 자손 가운데서, 므세사벨의 아들 브다히야가 왕 곁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관련된 일을 맡아보았다.(느 11:24)“
왕 곁에 이미 이스라엘 백성을 돌볼 한 사람을 세워두셨다는 구절. ‘딸아, 네 열심이 아니라 내 열심이 일한단다.’ 이스라엘을 다시 세우기 위해 성전을 회복하시고 성벽을 재건하시는 주님께서 예배자들을 세우시고 또 그 예배자들을 돌보기 위해 한 사람을 왕 곁에 세우시는 섬세하신 일하심들.
챗GPT와 읽는 말씀은 인사이트에서 멈춰 섰지만 주님께 기도드리며 읽은 말씀은 나를 쪼개어 보여주시고 또 주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보여주신다. 기도하지 않고 화면을 향해 묻기만 했다면 주님이 내게 물어오시는 물음은 듣지 못했을 것이다. 때론 질문을 하는 것보다 질문을 받고 잠잠히 기다려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편리함보다 불편함이 더 크게 일할 때가 있다.
자기 계발서를 읽다 보면 더 고차원적인 일을 하기 위해 집안일도 외주, 육아도 외주, 이것저것 모두 외주를 주고 그 시간에 사업 아이디어를 구상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자주 접한다. 내가 던지는 질문만을 붙들고 질주하는 삶이 그런 것 같다. 하지만 아이디어는 설거지하면서도 번뜩이고 아이 옆에 앉아 노닥거리다가도 번뜩인다. 지루해 보이는 상황 가운데 있을 때만 들려오는 질문들이 있기 때문이다. 불편함을, 지루함을 감수하고 느긋이 있는 그런 시간이다.
이제 화면을 향해 질문을 쏟아내던 손가락을 잠시 멈추고 내게 무엇을 물어오시는지 더 귀 기울이고 싶다. 아이와 그림 그리다가, 또 공놀이를 해주다가, 모두 접어두고 졸려하는 아이 옆에 누워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