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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로우 Apr 12. 2020

그들만의 리그가 나의 리그가 되다.

사실은-드디어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박사과정을 준비한지는 벌써 수 해가 지났다. 여느 석사생처럼 나는 박사과정으로 바로 진학하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원하던 원하지 않던 임시적인 중간단계로 생각했던 연구원 생활이 길어지며 어느새 3년이나 풀타임 직장인으로서의 일상을 영위하고 있었다. 일을 하면서 박사과정을 지원했기 때문에 빠듯하고 철저할 수 있었지만,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소모적인 시간이기도 했다.


수년간 내가 원하는 분야를 공부하겠다는 열망, 그리고 박사과정에 대한 욕망으로 나는 옆이 보이지는 질주마처럼, 반쯤 미친 상태로 지난 3년을 보냈다. 그리고 그건 단순히 열심히 공부하는 것만을 의미하진 않았다.


이상이 있다보니 현실의 내가 마음에 차지 않았고, 너무 오래 공부하고 스트레스를 받다보니 아프고 우울했고, 정해진 결과 없이 오랜 기간 희생을 하다보니 의심이 들었다. 고통스러운 그 시각들이 모여서 내 삶을 이뤘다. 누군가는 쉽게 해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 과정들이 너무나 힘겨웠기 때문에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할까에 대한 고민뿐 아니라 나의 욕망은 바람직한가 따위에 대한 결벽에 가까운 자기검열을 하게 되었다. 너무 고통스러웠기에 그것을 왜 해야 하는지, 과연 이러한 삶과 목표가 옳은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게 된 것이었다.


박사과정 지원에 모두 실패했을 때는, 공부와 박사과정을 위한 부분이 모두 도려내 지면서, 태어나고 죽는 그 순간까지 주어진 이 삶이라는 시간을 과연 무엇으로 채울 것이며 그것이 의미있는가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모든 순간이 ‘허무’라는 느낌으로 이어졌다. ‘삶의 의미를 고민하게 된 것은 딱하다’라는 말을 남겨둔 적이 있다.


내가 너무 혹독하게 자신을 몰아치고, 우울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기에 주변 사람들의 걱정도 컸다. 또한, 하필이면 소확행의 시대에서 나의 노력과 꿈은 자연스러움을 거스른, 왜곡된 욕망의 발현으로 치부되기도 하였으며 나는 주변인에게 때로 답답하고 딱한 그런 친구였다. 혹자에게 나의 목표와 노력은 학벌에 대한 집착이었고, 어디선가 주워들은 정신분석학의 관점에 따르면 고작 열등감이었으며, 나의 목표 또한 얼마든지 폄하될 수 있는 그 정도의 수준이기도 했다. 그러한 반응들을 접할 때마다 나는 내 욕망의 뿌리는 무엇이며, 왜 이렇게까지 노력하는가에 대해 다시금 고민하게 되었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원하는 곳에 이르기 위한 방법을 전통적인 엘리트들처럼 어릴 때부터 간접적으로 체득해오지 못했다. 내 꿈을 달성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하고 그것은 어떻게 획득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다. 나는 언제나 열심히 하고, 독하고, 올바랐지만, 실패했다. 열심히 하면 된다던 세상이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맞닥뜨렸을 때, 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이해하는 것도, 여전히 내가 원하는 것을 가지지 못하는 나를 받아들이는 것도 어려웠다. 이 과정이 누군가에겐 쉬웠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 정도까지 고생한 것이 자존심 상할 정도로, 고통스럽게 그 과정을 지냈다.


불안과 불만족, 어슴푸레한 우울감 같은 것은 진화의 시발점이자 토대가 되었다. 비록 힘들 수 있지만, 그 감정들의 역할만은 나의 성장통과 같았다. 적어도 나에게는-어떻게 하면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지 알지 못했던 나에게는-그런 혹독한 발전의 시간은 필요했다.


병원에 가서 울면서 진료를 받고 나와서 인생의 의미를 고민하며 집으로 홀로 걸어가던 그 시간이, 목표 달성에 대한 집착으로 온 인생이 점철되어 있었던 것이라 하더라도, 발전되고 있던 순간임을 이제사 안다. 그렇지 않고서 나는 박사과정에 합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 내가 이 글을 쓰고자 하는 이유는 나처럼 순수하게 열심히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함이다. 이것은 단순히 유학의 팁과는 조금 다르다. 나는 원래 열심히 했기 때문에, 다른 방식을 찾아야 했고, 꾸준히 절대적인 노력을 해야 했고, 그 과정을 지나오며 떠오른 무수한 질문에 답을 해야 했다.


나는 못해내는 것을 쉽게 해내는 것만 같은 ‘그들’  

천재성은 무엇이고 높은 생산력은 어떻게 얻는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다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열심히 했는데 왜 실패하는가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끊임없이 몰려오는 문제가 있다면 삶은 너무 지치는 것이 아닌가

대체 왜 좋은 학교에서 공부하고 싶은가

이러한 나의 욕망은 과연 옳은 것일까

나는 대체 어떤 왜곡된 마음으로 이만큼의 정신적 고통을 가져오는 욕망을 가지는가


그나마도 배부른 소리일 수 있지만, 이런 것들 말이다.


나는 꼰대의 자격이 없어 꼰대질은 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하기도 싫다. 그러나 나는 겸손함도 싫다. 겸손함은 환상을 극대화하고, 성공의 예시가 제한적으로 공유되게 한다.  


나는 ‘운이 좋았다’는 성공한 사람들의 말을 매우 싫어한다. 경쟁사회에서 사람들의 당락을 좌우하는 것은 실력이 기본이 된다. 그러나 같은 것을 목표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비슷한 실력이다. 그때 작용하는 것들은 무엇인가. 그것은 정말로 운일까.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부분은 없을까. 그러한 요소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지는 않는다 해도, 그것들을 경험적으로 알고 통제하는 사람들이 나는 성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운)좋은 기회'는 사실 더 좋은 기관에 있을수록 많다. 운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은 있다.


열심히 한다고 성공하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부분이 물론 있다 하더라도, 조금 과격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운으로 여겨지는 요소들이 무엇인지, 현재 상황이 어떤지 그 정보를 가지면 대처할 부분이 커진다.




나는 전통적인 엘리트가 아니다. 앞으로도 아닐 것이다. 전통적 엘리트라는 단어의 정의와 기준에 대해서는 논할 것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거나 저쨋거나, 결과적으로 나는 ‘나 같은 것의 이력서는 보지도 않고 탈락시킬 것만 같았던’, ‘전통적 엘리트’의 상징과 같은 곳에서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그것도 무려 두 곳에서.


앞으로 생산성, 운, 실력과 기회를 만드는 방법, 관점에 대해 배우는 점을 공유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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