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색깔 잎새 하나 고개를 내밀듯, 나의 고개 또한 내밀어 푸른 봄을 즐기고 있다. 무엇이든 시작하기 좋은 이 계절, 즐길 여유도 없이 내 속을 태우는 여름이 찾아온다.
시작은 참 좋다. 적절한 바람과 환기를 시켜주는 옷차림 그리고 매력 방출이 가능한 하지만 누구에게는 꽁꽁 숨기고 싶은 이 계절, 여름이다. 점점 더워지는 날씨를 시원한 아메리카노나 열대아 과일로 달랜다. 입 안은 언제나 차가움으로 채우고 싶은데 몸에는 열기가 가득하여 차가웠던 입안이 다시 뜨거워진다. 그렇게 수도 없이 차가운 걸로 입안을 채우다 배탈이 난다. 모든 것이 지쳐갈 때쯤 일탈 욕구가 샘솟는다. 화려한 옷차림, 신나는 노래, 술이 오고 가는 욕구 중심의 파티, 아껴놓은 휴가, 죽어있던 분노, 모든 것들이 깨어난다. 평소에 입어보지도 않던 옷을 입어보고 싶고, 조용하기만 하던 자가 파티를 가고 싶고, 묵묵히 일하던 자가 떠나고 싶고, 인내심 강한 자가 다 던져버리고 싶다. 이때만큼은 내가 내가 아니다. 내 안에 다른 자가 존재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런 것 따윈 지금 중요하지 않다. 그런 것까지 생각하다간 더워 죽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을 잊게 해 줄 장소로 잠시 떠난다.
하지만 떠난 것도 잠시, 나에게 일탈을 오랫동안 허용해주지 않는다.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간다. 잠시 즐기려고 하면 어느새 마지막 날이다. 이런 젠장. 그렇게 열심히 달려왔는데 나를 위한 시간은 고작 이 정도밖에 안되다니. 그렇다고 어쩌겠는가. 피한다고 될 일도 아니고, 현실을 마주할 수밖에. 그렇게 길지만 짧았던 한여름밤의 꿈은 내 마음속에 깊이 잠든 채로 현실로 돌아온다.
현실에 적응하여 살다 보니 어느새 시끄러웠던 더위는 가고 잔잔한 바람과 함께 가을이 슬며시 다가온다. 온 세상이 조용해진다. 하늘은 높아지고, 더울 듯하면 바람으로 말려주고, 낙엽이 하나둘 떨어지며 세상을 빈 공간으로 만든다. 그렇기 때문일까. 나의 공간이 생겨난다. 비워지고 있는 온 세상이 나 자신으로 가득하다. 신경 쓰지도 않았던 떨어지는 낙엽 하나에 눈길이 가고, 나 살기 바빴는데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나의 지난날을 생각하게 되고, 잘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그동안 뭘 한 건가 싶다. 잘 해왔다고 날 달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제 곧 한해도 끝나간다는 생각에 울적해진다. 열심히 살아도 알아주는 이 없는 것 같고, 많은 것들을 포기해도 얻은 게 없는 것 같다. 남들에게는 나의 인생이 몇 해 안된 것 같아 보이지만, 하루하루가 고달팠던 나에게는 수백 년만 같다. 이번 연도만큼은 잘 해내고 싶었는데 눈앞에 놓인 나의 현실은 잘게 부스러진 돌멩이 같다. 열정적으로 살던 나는 어디로 가고, 행복을 꿈꾸던 나는 어디로 가고, 상처투성이의 자갈만 남은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우연히 내 눈에 들어온 시 한 편. 평소에는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고, 이상한 잡소리만 같던 시가 그날만큼은 나에게 위로가 된다. 나만 이렇게 살고 있는 게 아니구나, 나만큼 힘든 사람이 있구나, 이 시를 쓴 사람도 어떻게 살아내고 있구나 싶다. 순간 내가 너무 못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처럼 힘들었던 누군가의 끄적임에 위로가 되다니. 슬퍼해야 하는데 위로가 되다니. 하지만 그런 생각도 든다. 누군가 나의 이야기를 듣고 슬퍼하기보다는 위로가 된다면 차라리 그게 더 좋을 것 같다고. 나의 이야기를 듣고 엉엉 울면서 아파하고 슬퍼하는 것도 좋지만, 이야기를 들려줘서 고맙고 살아내줘서 고맙다고 덕분에 위로와 힘이 되었다고 말한다면 그게 더 나의 마음을 울리고 살아갈 힘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런 내가 못된 것 같다가도 이런 마음이 들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순간이다. 인생은 정말이지 모순덩어리다.
여름은 짧게 느껴지는데 길었고,
가을은 길게 느껴지는데 짧다.
여름의 순간은 짧게 기억되고,
가을의 순간은 길게 기억된다.
아마도 그 이유는 나라는 존재를 가을에 더 깊이 느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온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사이 가을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