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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등불 Dec 26. 2021

살아내줘서 고마워

그대의 전쟁터

눈을 뜨니 하얀빛이 나를 쏘고, 시끄럽지만 알 수 없는 정체들로 가득한 이 공간, 내가 지내던 곳이 아니다.


내가 있던 곳은 아늑하고, 넓지도 좁지도 않고, 부드러운 물결들이 나를 감싸고, 굳이 눈을 뜨지 않아도 두려운 것이 없었던 공간이다. 그런데 갑자기 때에 되어 나는 밀려났고, 웬 거인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고, 갑자기 동그란 어딘가로 옮겨진다. 그렇게 이 세상에 태어난 존재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삶이라는 전쟁터에 들어가게 된다.




그대의 전쟁터는 어떤 모습이었는가. 나의 전쟁터보단 나는 그대의 전쟁터를 알고 싶다. 이쯤 되면 끝날 것 같은데 끝나지 않고, 누구라도 붙잡고 이야기하고 싶었을 텐데 혼자 꾹꾹 담아내야만 했던, 그 무게를 홀로 지고 가야만 했던, 그 길이 가시밭길이나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던, 다음 해에는 빛을 볼 줄 알았는데 또 다른 어둠이 찾아와서 절망했던, 그래서 더 이상 일어설 힘도 없던 그대의 마지막 이야기를 이번해가 끝나기 전인 마지막 순간에 모두 알고 싶다.



그대의 전쟁터는 동물의 세계이지 않았는가. 바로 약육강식의 세계 말이다. 약한 모습을 절대로 봐주지 않고, 피투성이가 되어도 싸워야만 했던 세계. 한때 함께 놀던 무리들은 어디로 가고, 한때 나를 지켜주던 자들은 어디로 가고, 한때 평화로웠던 숲 속 풍경들은 어디로 가고, 정신 차려 보니 모두가 자기 것을 빼앗기지 않고자 이빨을 드러낸다. 느리게 가면 육식동물에게 공격당하고, 빠르게 가면 하늘에 있는 존재에게 공격당하고, 숨어 지내면 어둠의 지배자에게 공격당하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피를 흘려가며 원하는 바를 향해 나아간다. 홀로 길을 가다 길을 잃어 밤이 되었을 때 조그마한 텐트 속에서 잠을 청하나, 정체를 알 수 없는 발걸음 소리에 두려워 밤을 새운다. 그 와중에 위로가 되는 것은 하늘을 바라보았을 때 작게 반짝이는 빛이고, 날이 새 들리는 골짜기 냇물 소리다. 빛 하나와 물 한입을 마음에 품고 지나와준 그대여, 살아내줘서 고맙다.



그대의 전쟁터는 불의 세계이지 않았는가. 바로 아프리카의 세계 말이다. 탈출하고자 하면 잡혀서 타 들어가던 몸을 지켜야만 했던 세계. 함께 여행 온 자들은 어디로 가고, 길을 안내해주던 자들은 어디로 가고, 챙겨 온 짐들은 어디로 가고, 정신 차려 보니 빈털터리가 된 채로 잡혀가고 있다. 이대로 죽는 건가 싶었는데, 오늘은 다른 희생양이 있나 보다. 하지만 전혀 다행스럽지 않다. 그가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것을 지켜봐야 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진행되는지도 모른 채 희생양이 되는 것보다 나의 앞날을 알고 희생양이 되는 것이 더 고통스럽다. 난 이곳이 어딘지도 모른 장소에 갇힌 채로 문 사이를 통해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이를 눈물을 흘리며 바라본다. 내가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일까. 그의 시선이 문을 향했고 마지막 순간까지 눈을 똑바로 뜨면서 나에게 도망치라고 외치는 것 같다. 아마도 그 역시 이곳에 갇혀있다가 오늘의 먹이가 된 듯하다. 그는 온 힘을 다해 몸부림을 치고 정복자들은 깔깔 웃어댄다. 그 모습이 재미있었는지 문 앞을 지키던 자가 등불을 내려놓고 동료들에게 간다. 그때 등불이 오두막 안을 미세하게 비춘다. 어두웠던 곳이 조금은 밝아졌고, 나는 날카로운 것부터 찾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도망치려던 자가 쓴 것인지, 죽이고자 쓴 것인지 모르겠으나, 낡았지만 날카로운 도구를 발견했고 묶여있는 손으로 발에 묶인 줄부터 잘라낸다. 발로서 손에 묶인 줄을 잘라내기엔 힘도 없고 요령도 없다. 잠시 생각하다 땅에 날카로운 것을 박은 채 톱질하듯 잘라낸다. 중간에 칼이 빠지긴 했지만, 어찌어찌 묶여있던 손을 풀었다. 어떻게 하면 이곳에서 나갈 수 있을까. 한창 파티를 진행하고 있는 모습은 끝이 보여가고, 등불의 빛도 점점 사라져 간다. 시간이 없다. 뭐라도 찾아야 한다. 조용하고 느릿하게 찾고 있던 도중 결국 불이 꺼졌다. 큰일 났다.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다. 이것저것 찾다가 그들의 상황이 궁금해져 문틈 사이로 보니 끝이 보인다. 그때 몇 명이 이곳을 바라보지만 오지는 않는다. 불이 꺼진 덕에 아무것도 보이질 않나 보다. 다행인 걸까. 어느새 새벽이 되었고, 그들은 자러 갔는지 극소수만 보이고, 나의 눈은 어둠에 익숙해져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한다. 분명 탈출을 시도했던 사람이 있을 거라는 생각에 조용히 곳곳을 살핀다.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큰일이다. 물에 젖어 무게가 나가면 안 된다. 오두막 안을 비가 적시면서 땅에 물이 젖기 시작한다. 그때 무언가가 번뜩 떠오르기 시작하면서 가장자리에 있는 곳을 살펴본다. 작은 구멍이 보인다. 낡아빠진 칼 하나로 온 힘을 다해 판다. 구멍이 조금 커졌다. 나갈 수 있는 정도일까 싶어 시도해본다. 마침 들고 온 물건도 함께 온 사람도 없다. 나라는 사람의 몸집도 크진 않다. 그런데 나가기엔 조금 좁다. 결국 인상을 찌푸리고 온 몸에 흙이 묻고, 곳곳에 긁혀가면서 겨우 나왔다. 바로 도망치고자 했지만 통로가 눈에 걸린다. 칼을 가져가고자 하지만, 무언가 마음에 걸린다. 결국 칼을 안에 던지고, 통로를 다시 흙으로 채운다. 언젠가 잡혀올 누군가를 위해서다. 그 작업을 하면서 상처투성이가 되었지만 이제는 지체할 시간이 없다. 주변에 무엇이 있든 신경 쓸 시간이 없다. 도망쳐야만 한다. 동물소리를 내는 것 마냥 근처 숲 속으로 들어간다. 집을 수 있는 단단한 나무 막대기 아무거나 집어 들고 어디든 오른다. 미친 듯이 산 꼭대기로 올라가 바다부터 찾는다. 내가 타고 온 선박 하나가 보였고, 곳곳의 나무들과 바위들에 의지해가며 내려간다. 비가 내린 덕에 미끄러워 다치기도 하고, 아슬아슬한 순간들이 많았지만 어찌어찌 내려와서 최선을 다해 바다를 항해한다. 등불 하나와 빗줄기 하나로 겨우 목숨을 부지한 그대여, 살아내줘서 고맙다.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대해선 말하지 않으련다.

그저 거칠었던 길과 산과 밤과 바다를 건너

삶의 끝자락까지 살아와준 그대여.

살아내줘서 고맙다.


https://www.youtube.com/watch?v=cSVRnBdVps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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