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갖는 것도 이렇게 힘들 줄이야
난자 채취를 위한 자가주사를 시작한 지 세 달째, 지난 두 달간은 - 난포가 자라지 않아 - 조기 배란돼 난자 채취에 실패했다. 주사를 맞는 수고스러움과 약값을 날려버린 것과는 별개로 패기 있고 희망에 차 있던 내 모습이 사라져 갔다.
병원에 가서 시키는 대로만 하면 진척이 있을 줄 알았다. 갈 길이 구만리인데 한 걸음 떼기도 이렇게 힘들 줄이야. 거듭된 ‘실패’에도 세 번째 난자 채취에 도전했다.
이때 즈음 회사에 시험관 시술을 준비하고 있다고 알렸다. 주 3회는 검사를 받아야 했기에 그럴 때마다 휴가를 낼 수 없었다. 병원 가는 날 출근시간만 1시간 정도 조정할 수 있게 해달라고 양해를 구했다. 다행히 우리 회사는 선택출퇴근제를 시행하고 있어서 늦게 출근해도 근무시간만 채우면 됐다. 회사 생활 10여 년만에 ‘개인적 일’로 업무에 양해를 구했다. 머리로는 나의 권리라고 생각하면서도, 미안하고 염치없어 하는 내 태도가 비참했다.
전쟁 같은 하루하루가 이어졌다.
아무리 양해를 해줘도 10시까지는 출근을 해야 했고, 그러려면 6시에 집에서 나와 병원에 가야 했다. 그 시간 9호선은 ‘지옥’이었다. 20-30분 더 걸리지만 덜 붐비는 돌아가는 길을 선택했고, 그렇게 병원에 도착하면 ‘워킹(예비)맘’들이 대기실에 가득했다. ‘우리 다들 잘해보자’
한 시간에서 길게는 두 시간을 대기해 아홉 시 반이 넘어 진료가 끝나면 후다닥 택시에 올라탄다. 대기시간이 짧은 날은 9시에 출근을 하기도 했다. 이렇게 부지런을 떨어도 대기시간이 길어져 10시까지 출근을 못할 때면 택시에서 마음을 졸이고 죄송하다는 문자를 보내며 서러움에 숨죽여 울기도 했다. 새벽 여섯 시에 집에서 나와 부지런을 떨었는데도 결과적으로 지각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게 너무 억울했다. (참고로 회사는 우리집에서 대중교통으로 30분, 자가로 10분 거리에 있다.) 돌아 돌아 회사에 출근하는 날들이 반복됐다.
그렇게 나는 육체적으로도 지쳐갔다.
4월, 세 번째 난자 채취에 도전했다. 생리 이틀 째에 내원해 자가주사를 시작했다. 5일 정도 자가주사를 하고 병원에 정기검진을 하러 갔다. 그날은 검진일이 토요일이라 남편과 함께 했다. 토요일 병원은 그야말로 문전성시다. 우리는 혼잡한 시간을 피해 첫 진료를 받고자 새벽같이 갔다.
여느 때처럼 초음파 검사를 했고, 초음파를 본 교수님 차분하지만 조금 다급하게 주말 사이에 배란될 것 같다고 했다. 그래 나의 문제 ‘조기 배란’. 바로 지난달에 난자 채취를 앞두고 조기 배란된 이력이 있던 지라 교수님은 이번 달에 시험관 시술은 못할 것 같다고 했다. 대신 인공수정을 해보자고 했다. 바로 지금!! 뜻 밖에 인공수정이지만 임신에 한 걸음 다가간 것 같았다.
인공수정의 성공률은 자연임신과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침대에 누워서 기대했다. 누구라도 기대할 거야.
5분도 안 돼서 아주 간단한 ‘조치’가 끝났고 삼십 분 정도 혼자 누워있다가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그날 저녁, 인공수정과는 상관없겠지만 심한 두통이 왔다. 시술 후라 걱정되는 마음에 두통약 복용 가능 여부를 묻고자 병원에 전화했다. 당직 간호사는 참아보라고 했다. 그냥 전화하지 말고 바로 먹을 걸.
도저히 두통을 참을 수 없었고 그냥 약을 먹었다. 두통 대신 불안함이 밀려왔다. 나 잘못한 건가?
약을, 그것도 그날 한 번 먹었다는 이유로 임신이 되어 잘못되면 어떡하나 걱정의 마음으로 열흘을 보냈다.
다음 달, 여느 때와 같이 생리가 시작됐다. 실망했지만, 덤덤함을 찾고 다시 병원에 갔다. 그 실망이 앞으로 얼마나 반복될까.
5월, 네 번째 난자 채취 도전했다. 생리 이틀째에 병원에 내원해 자가주사를 맞은 지 3-4일 찌 즈음 초음파 결과를 보고 교수님이 이번 달 진행을 중단하자고 했다. 또 왜? 이번엔 물혹으로 의심되는 것이 있다고 했다. 난포일 경우 터지면 난자 채취가 불가능하니 중단해야 한다고 했다. 또 다음 달을 기약하기로 했다.
네 번째 난자 채취도 그렇게 실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