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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 경 Jul 23. 2018

관심과 간섭의 줄다리기

     

삶에서 관심만큼 중요한 것은 없을 것이다. 관심은 세상과 모든 대상에 대한 내 마음의 표현이며, 존재감을 드러내는 삶의 방식이다. 그래서 누군가 나에게 관심을 주면 혼자라는 결핍에서 벗어나고, 나 또한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되길 바란다. 하지만 살다보면 관심의 의미가 변질되거나 왜곡되어 본의 아니게 상대를 간섭하고 구속하게 다.

종종 관심과 간섭의 경계가 불분명할 때  당혹감을 느낀다. 관심은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의 상황과 마음의 상태, 감정의 온도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이 관심인지 간섭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사실 관심이란 본질적으로 순수하고 소박한 감정이지만 때론 애정과 염려의 의미로 채색되기도 , 조언과 질책의 의미로 둔갑하기도 한다. 이처럼 관심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때 그것의 정체를 확인하려는 마음은 혼란에 빠진다. 일거수일투족 사사건건 참견을 하면서 그건 관심이고 애정이라 말하거나,  상대에게 무관심하지 않기 때문임을 강조하면서 집착을 관심으로 정당화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머리로는 이해하면서 마음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을 때, 상대의  과도한 관심이 자신을 억압하는 기제로 작용할 때 그것이 간섭임을 느끼게 된다.

     

관심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필요하고 중요하다. 하지만 지나친 관심은 무관심만큼이나 위험한 일이다. 관심이 지나쳐 간섭으로 느껴지면 누구나 자신의 독립적 자아를 구속하고 훼손하려는 상대로부터 벗어나길 바란다. 상대의 관심이 부당한 집착으로 느껴지면, 관심의 긍정적 의미들이 반대로 온갖 부정적 의미로 탈바꿈한다. 만약 그런 관계가 타인이 아닌 가족이라면 심각한 갈등을 일으키며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줄 것이다.

     

아무리 좋은 약도 많이 먹으면 부작용이 생기듯이 관심 또한 지나치면 상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다. 특히 가정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곳이기 때문에 더 많은 관심과 간섭이 존재한다. 돌이켜보건대 처음 만남의 시작은 풋풋한 관심과 소박한 애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정을 이루면서 오히려 상대를 독립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누구의 무엇으로 인식하기 시작했고, 그러한 소유의식이 서로를 간섭하도록 부추긴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부모가 자녀를, 부부가 서로를 관심의 명목으로 간섭의 족쇄를 채운 적은 없었는지 되돌아본다. 가끔은  지나친 관심으로 아이들을 힘들게 하진 않았는지, 심한 참견으로 상처를 준적은  없었는지 반성하게 된다.

얼마 전 전화도 없이 늦게 온 딸아이를 혼낸 적이 있었다. 딸을 걱정했던 마음만 앞 딸의 말은 들어보지 않고 성급히 아이를 나무란 것이다. 내 감정만을 내세우고 화를 낸 점은 잘못이었다. 냉정히 따져보니 아이의 말을 듣지 않고 화를 낸 것은 그 바탕에 딸에 대한 믿음보다 나의 독선적 믿음이 우선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핸드폰 배터리가 나가서 전화를 못하고 나름 집에서 걱정할까 노심초사해 빨리 오려고 했던 딸아이의 상황을 알게 되니 미안한 마음이 컸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부모로서 당연한 일을 했다는 자존심 때문이었다.

그 일을 겪고 새삼 느끼는 바가 있었다. 사랑할수록 상대를 독립된 자아로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것,  믿음으로 묵묵히 지켜보고 지지하는 것이 진정한 관심이라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감정의 줄다리기를 잘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칫 기울어질 수 있는  관심과 간섭의 경계에서 한 쪽으로 기울지 않도록, 무엇이 관심이고, 간섭인지 명확히 알 수 있도록 현명하게 줄을 밀고 당겨야 함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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