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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 경 Jul 29. 2018

기억의 곳간, 그 깊은 곳에

아름다운 추억 하나쯤은 생각날 법한 밤이다. 검은 하늘에 박힌 불그레한 눈동자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너무도 낯익은 모습에 나도 물끄러미 올려다본다. 어둠 속에서 서툰 키보드를 두드리며 고즈넉한 밤을 맞고 있다. 풀벌레 소리가 밤의 정적을 깬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도 어렴풋이 들려온다. 지금 모습을 그림으로 그린다면 아마 집 한 쪽 벽에 걸려 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오래된 액자 속 흔한 풍경화일 것이다. 너무도 익숙하고 습관이 돼버려 눈길조차 주지 않는, 먼지를 뿌옇게 쓰고 있는, 마치 그곳에 영원히 붙박아 있었던 것처럼 아니 그렇게 있을 거란 착각으로 무심히 지나쳐버리는 풍경화들 중 하나일 것이다.


기억의 곳간 속에는 제법 많은 기억들이 저장돼 있었다. 곳간은 그렇게 크고 넓지 않아 흔한 풍경화를 다 간직할 수 없었다. 아마도 특별한 것들을 간직했을 것이다. 아니 가끔 자질구레한 것들도 함께 섞여 들어갔을 것이다. 보통은 기억의 곳간이 차서 넘치지 않도록, 무질서하거나 엉키지 않게 미리 일기장이나 메모장 같은 곳에 곳간의 기억을 덜어내 분류하거나 정리해두었을 것이다. 그러면 언제든 찾고 싶은 기억은 편리하게 찾을 수 있다. 하지만 게을러서 또는 정리가 필요 없다고 생각한 사소한 것들, 간직하고 싶지 않은 것들은 레테의 강에 흘려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기억을 마음대로 조정할 순 없다. 그것은 그저 무절제하게 들어와 아무렇게나 자리잡고 있다가 곳간 주인의 생각에  따라 버려질 수도 간직될 수도 있는 것이다. 무질서한 기억들을 며칠 아니 몇 달을 그저 내버려두거나 방치해서 그것이 제멋대로 얽히고설켜 뒤늦게 무언가 찾으 한 참을 뒤적거렸던 적도 있었다. 여기저기 흩어져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것들을 하나하나 건드려 정리하다보면  의도치 않은 기억을 만나기도 한다.

의도치 않은 기억을 달리 말하면 건드리면 고통스런, 그래서 곳간 깊숙한 곳에 버려두고 찾지 않는 기억을 말한다. 그것은  잊혀지길 바라지만 시간이 흘러도 절대 잊히지 않는 기억 중 하나이다. 특별히  행복했던 순간이나 고통스러웠던  순간은 잊히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들은 기억의 차별을 거치며 하나는 가장 환한 앞자리에, 다른 하나는 가장 밑바닥 어둡고 쓸쓸한 곳에서 자신을 불러줄 날을 기다리고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곳간의 기억들이 새어나가는지 휘발되는지 자꾸 비어짐을 느낀다. 틈틈이 곳간 속을 뒤져 정리한다. 최근의 것들은 아직 말랑말랑 부드러워 각기 특유의 빛을 간직하고 있지만, 오래된 것일수록 먼지가 쌓여 털어내고 닦아야 겨우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마저도 누렇게 퇴색되거나 모양이 변한 것들은 그나마 한 참을 다듬고 채색하고 골몰해야 그것의 불확실한 정체를 희미하게 떠올릴 수 있다. 어떤 것은 너무 냉담해 아예 모른 척 하거나 위선을 부리기도 한다. 어떤 것은 조각나고 희미해진 채로 곳간 속을 맴돌다 사라져버린다. 하지만 누군가 말했듯 기억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퇴적물처럼 쌓이는 거라면 시간의 흔적이 두텁게 쌓일수록 맨 아래의 것은 무거운 억눌림 때문에 빠져나오기 힘들 것이다.

     

언제부턴가 억눌린 기억들의 일부가 불쑥 나타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곳간 심부에서 억눌리고 소외된 채 오랜 시간을 버텨온 기억들이 다른 기억들헤치고 나오려 안간힘 쓰고 있었다.  십년  돌아가신 외할머니에 관한 기억도 그 중 하나였다.

외할머니는 뚱뚱하신 편으로 여름이 되면 무척 힘들어 하셨다. 지병이 있던 할머니는 유난히 더위에 약하셨다.  어릴 때 부모님이  맞벌이를 해서 할머니가  나를 돌봐주셨다. 외손녀라면 끔찍이 위하셨던 할머니는 당신이 몸이 불편하심에도 손녀의 응석을 다 받아주셨다.

기억 속의 할머니는 너무 아득해서 사진 속에만 존재하는 것 같다. 한복을 즐겨 입으셨던 후덕하고 인자하신 모습이 실루엣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모습은 흐려졌지만  할머니와 함께 했던 기억은 마치 설화처럼 계속 이어져 여름이 되면 되살아났다 사라지곤 한다.

할머니는 날로 쇠약해지셨다. 그런데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다들 바쁘다는 핑계로 할머니에게 무심했다. 할머니는 가족에게 늘 무엇을 해 주시는 분이라는 무지한 타성으로 인해 그분이 오히려 가족의 세심한 관심과 보호를 받아야 할 노인이며 환자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그분의 고마움과 소중함을  모르고 당연히 받기만 했다.  할머니는 가족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고 몸이 아파도 내색을 하지 않으셨다. 할머니의 평소와 다름 없이 인자한 표정 이면에 감췄던 고통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다.

그 시절 내 머릿속은 너무 복잡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할머니의 상태를 가장 가까이 있었던 내가 모를 수 있었을까! 내  문제만 골몰했던 그 이기심은 아무리 자신을 질책해도 모자라다. 어떤 핑계로도 합리화시킬 수 없는 것이다. 할머니가 나한테 했던 십분의 일만큼이라도 내가 그분에게 도움이 됐더라면 그처럼 고통스럽게 돌아가시지 않았을 것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한참을 가슴 한 가운데 돌멩이가 얹혀 내려가지 않았다. 그때는 철이 없어서 그것이 죄책감인지 몰랐을 것이다. 아니 애써 외면했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 일을 생각하면 마음이 답답하고 속이 쓰려 늘 소화가 되지 않았다. 꼬챙이처럼 말라만 갔다. 괴로운 나머지 고통의 정체를 마음 속에서 몰아내려고만 했다.

     

세월이 흐르고 아픔은 무뎌지고 기억은 빛을 잃어 어둡고 음울한 곳간 밑바닥에 가라앉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여름만 되면 그것은  곳간 깊숙한 곳에서 꿈틀거리며 나오려 발버둥치곤 했다.  나는 느낀다. 어떤 기억은 누르려 할수록 더 세게 튕겨 나온다는 사실을,  애써 기억을 잠재울수록 더 큰 고통의 대가를 치뤄야 한다는 것을. 그래서 아무리 고통스럽고 아픈 기억일지라도 그것과 대면해야 함을, 좋든 싫든 그것이 나의 일부임을 인정하고 직시해야 함을 뼈져리게 느낀다.

고통의 시간은 절대 헛되지 않음을  믿고 있다. 이제는 나자신을 용서해야 겠다. 그것이 할머니의 마음일 것이다.  부모는 자식이 잘못해도 그가 행복하길 바라기 때문이다. 나는 느낀다. 어두운 기억들이 밖으로 나올 때마다 그 기억들은 새로운 의미로 변하고 있음을. 할머니에 대한 죄책감이 반성으로, 반성은 깊은 성찰로, 성찰은 나를 깊은 내면으로 이끌어 곁에 계시지 않지만 그분의  마음을 생생히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온화하고 인자하신  할머니의 미소를 떠올릴 때마다 그분의 크나큰 사랑을 아이들에게 실천하리라 다짐한다. 그것이 그분에 대한 존경과 애정이며,  당신을 오래도록 기억할 수 있는 길임을 인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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