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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 경 Aug 06. 2018

낯선 산을 만나다.

바람은 잠들어 있었다. 나무에 등을 기댔다. 다른 때 같으면 가벼운 바람이 나무 사이를 강물처럼 흘러 부드럽게 나의  목덜미를 스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은 어쩐지 모든 게 잠들어 있었다. 새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 많은 이야기로 시끌벅적하던 산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해는 중천에 떠 있다가 구름 사이로 사라지길 반복하고 있었다.

상록침엽수 우듬지 위로 청설모 한 마리가 나타났다 금세 사라졌다.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없어져 버렸다. 평소 놈은 꼬리를 치켜세우고 동그랗고 까만 눈을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주변을  경계하고 탐색하는 빛이 역력했다. 나는 청설모가 달아날 줄 알면서도 살금살금 다가가 핸드폰으로 사진 찍을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은 그놈마저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하는 것이 영 수상쩍었다.

     

산은 이상하리만치 낯설었다. 아무리 오랜만에 왔다곤 하나 주변풍경이 이다지 생경하게 느껴지다니! 자주 다니던 좁은 길은 양쪽 옆으로 수풀이 우거진 길이었다. 그런데 꽤 몸통이 큰 나무 하나가 쓰러진 채 잔가지를 뻗어 길을 막고 있었다. 마치 길을 비켜주지 않으려 안간힘 쓰고 있는 듯 다. 살살 가지 틈새로 발을 집어넣어 가보려다 포기하고 다른 길을 택했다.

나무가 이리저리 엉켜 있어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길이었다. 한참을 방향감각을 잃고 나뭇가지를 헤치며 발이 닿는 대로 직관대로 올라갔다. 어느 정도 오르니 사람들이 다니는 길이 나왔다. 예전에 그토록 친근하게 느껴졌던 형제바위 앞에 다다랐다. 바위 두 개가 형제처럼 다정하게 서로 이마를 맞대고 있어 내가 지어준 이름이었다.

     

산 중턱쯤 올라왔을 때  한기가 느껴졌다. 바람 한 점 없던 하늘이 순식간에 깜깜해지더니 굵은 빗줄기를 쏟아내며 산을 때리기 시작했다. 조용하던 산이 한꺼번에 제각각 소리를 내는 바람에 불협화음이 일었다. 우두두둑 여기저기서 아우성치며 아픔을 호소하는지 아니면 기다리던 비를 맞아 환호성을 지르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언어들이 내 귓가를 두드렸다.

너무 갑작스레 일어난 일이라 어찌할 바를 몰라 무작정 앞으로 내려갔다. 분명 내가 올라 왔던 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비 때문에 경황이 없어서인지 길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마치 산이 일부러 길을 숨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갑자기 낯선 산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이 길이 두 갈래로 나 있었던가? 산의 모든 것이 의심스러웠다. 이정표의 글자는 흐릿해 잘 보이지 않았다.  

     

소나기는 곧 그칠 것이다. 대기가  불안한 시기엔 자주 일어나는 현상이다. 나는 조끼를 벗어서 머리에 뒤집어 썼다. 아무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하는 행동은 일종의 우스꽝스런 자기 위안, 근거 없는 믿음, 습관적인 것들이 주는 마음의 안정 같은 것일 게다.

비가 잦아들자 머리에 썼던 조끼를 벗었다.  미끄러운 바위 때문에 발걸음이 점점 더뎌졌다. 순간 뿌연 수풀 사이로 어떤 움직임이  있었다. 푸드득 날아가는 게 꿩 같았다. 순간 너무 놀라 몸이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작은 돌부리가 한 쪽 발에 걸리는가 싶더니 그만 앞으로 넘어졌다. 다행히 경사가 심한 곳이 아니었고, 넘어질 때 두 손이 먼저 닿아 손목 외에 다친 데는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  당시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다친 데 대한 당혹감이나 두려움이 아니었다. 섬광처럼 스치는 어떤 자각, 낯선 산은 결코 나를 적대시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오히려 풍부한 표정으로 나를 일깨워준다는 사실이었다.

     

누군가 말했다. 내가 무엇의 심연을 들여다보면 그것도 나를 들여다본다고. 내가 산을 더 꼼꼼히 볼수록 산이 나의 내면으로 들어올 것이다. 그동안 산이 친근했던 것은  습관적으로 산을 바라보아서, 산의 다양한 몸짓과 언어를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아서 그런 것일 게다. 낯선 모습의 또 다른 이름이  새로운 모습이라는 것을, 산을 더 많이 알아갈수록 산이 더욱 낯설거라는 역설을 어렴풋이 깨닫는다. 산은 가진게, 숨긴게 너무 많아서 늘 새로움으로 낯설게 다가올 테니.

숨었던 해가  다시 나타나자  비는 맥없이 물러났다. 물기에 젖은 산은 신선하고 눈부셔 보였지만,  왠지 예전처럼 친근하고 푸근했던 산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축 늘어진 나뭇잎을 받치고 힘들게 서 있는 가냘픈 나무들이 측은했다. 아예 쓰러져 바닥에 길게 누운  나무들은 방치된 채 밟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무게를 고스란히 견디고 있었다. 여기저기 둥치만 남은 나무들, 고사한  나무들, 사람들의 잦은 발길에  반들반들해진 바위와  파인 땅들을 보니 산의 고단함이 느껴졌다.


가끔은 산도 사람들이 귀찮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처럼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는 쉬고 싶을 것이다. 그럴 때면 나름의 방식대로 의사를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산의 그런 마음을 알고 바람도, 나무도, 새도, 청설모도 조용히 자리를 비켜주며 산의 고독에 동참하고, 하늘은 비를 보내 산을 위로하는 것 같았다. 산은 대부분 크고 넓은 품으로 사람들을 올라오라 반갑게 맞이하지만, 때론 내려가라 종용하기도, 가끔 사고로 경고하기도, 비를 불러 사람의 발길을 멈추게도 다. 나는 그것이 마치 산의 표식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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