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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 경 Aug 14. 2018

잘 안다는 착각

     

누군가를 잘 안다는 은  큰 착각이다.  오랜 시간 함께 살아온 배우자나 늘 지켜보았던 자식은 그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안다고 한 때가 있었다. 하지만 당시는 몰랐던 사실을 후에 알게 되거나, 내가 알고 있던 익숙한 모습과 전혀 다른 점을 발견했을 때, 내가 과연 그들을 제대로 알고 있었을까?  의구심이 생긴다. 가족도 그럴진대 하물며 타인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럼에도 막상 친근한 모습을 보면 왠지 상대를 잘 안다는 착각에 빠지곤 한다.

     

 상대도 나를 잘 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긴 그녀가 권하는 음식이나 기호품은 대체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일 경우가 많았다. 그녀는 말끝마다 ‘이거 네가 좋아하는 거지?’ ‘이런 일은 네 성격에 딱 맞는 것 같아.’ ‘아마 너 같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거야.’하며 나를 다 안다는 식으로 말하곤 했다.

     

나도 상대가 가족 이상으로 느껴질 때도 있었다. 사회에서 만났지만, 동갑이고 같은 일을 하며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기 때문에 끈끈한 유대감이 있었다. 고민과 아픔을 털어놓을 땐 세상 누구보다 나를 이해해준다는 느낌을 받았으니까. 서로 같은 마음이라고 당연히 생각했다.

하지만 상대를 잘 안다고 확신하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잘 안다는 것과 편하다는 것, 그래서 함부로 해도 된다는 것이 동의어처럼 뒤엉켜 서로 지켜야 하는 기본적인 것들이 배제되기 시작했다. 친밀감과 익숙함 속에 상대에 대한 존중, 사려 깊은 행동, 신중함 같은 것들이 묻히고, 상대가 어떤 행동을 해도 무조건 이해할 거란 근거 없는 믿음이 그릇된 편견과 오해를 낳았다.


서로에게 오해의 불씨가 싹트는 것은 참으로 사소한 일로부터이다. 격의 없이 무심코 던지는 말들이 쌓여 오해를 키우고, 깊은 상처가 돼 마침내 곪아 터질 때 비로소 뭔가 잘못됐음을 알게 된다. 이미 상대의 가슴에 애증이 켜켜이 쌓여 봇물 터지듯 상대의 마음을 덮쳐서야  그에게 했던 말과 행동을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알던 상대의 모습은 빙산의 일각이란 걸 깨닫게 된다.

     

본질적으로 누구를 이해한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인지 모른다. 나 자신도 모르는데 어찌 타인을 알 수 있겠는가. 실존주의 철학자 샤르트르는 타인들을 ‘다른 자아들’이라고 정의했다. 그러고 보면 세상은 수많은 자아들만 존재할 뿐이다. 자아라는 단단한 껍질 속에 고립돼 살아가는 개인이 다른 자아의 내면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너무도 외로운 나머지 상대를 알고 싶은 욕망이 그를 잘 안다고 부추기는지도 모를 일이다. 상대의 생각이나 감정에 동화되면 일시적으로 그가 무척 가깝게 느껴질 뿐이지 결코 그를  아는 것은 아니다. 한 사람을 안다는 것은 우주를  밝히는 것만큼 불가사의한 일이다.

     

궁극적으로 삶이 무수한 자아들과 만나 부딪히며 사 거라면, 다른 자아를 조금이라도 이해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자아 중 하나인  자신을 알도록 노력해야  할 터이다. 타인의 개성과 삶의 방식은 다르지만, 보편적 인간의 본질은 같기 때문이다. 누구나 상처로  인해 고통받기 싫어한다는 사실, 타인에게 존중받고 싶어한다는 사실,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과 행동에 대해 분노한다는 사실이다.

서로 자신을 살피듯 상대를 살핀다면 제멋대로 그를 판단하거나 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상대를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자신이 만든   허상에  꿰맞추려 하지 않을 것이다. 요즘은 가족을 대하면서, 친한 지인을 만나면서 그들을 안다는 생각을 버린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처음 만났던 때처럼 예의를 갖추자고 다짐한다. 만날 때마다  조금씩 알아가는 즐거움을 누리자고, 모르기 때문에 더 궁금하고 매력적인 거라고 마음을 다독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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