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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 경 Sep 06. 2018

고백

「사랑하는 딸아! 깊은 고민 끝에 진실을 밝히기로 결심했지만, 네가 상처를 받을까 두렵다. 꽃보다 더 예쁘게 자란 너의 모습을 보며 엄마는 세상에 부러울 게 없었다. 이제 엄마의 비밀을 말해줘도 될 만큼 네가 의젓하게 자란 모습을 보며 엄마를, 아니 우리 모두를 이해해주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편지를 쓴다. 엄마의 품속에서 천사처럼 고요히 잠들어 있던 너의 사랑스런 모습이 눈에 선하다.」 여기까지 썼을 때 미선은 주체할 수 없는 슬픔에 목이 잠겼다.


몇 달 전, 사월답지 않게 며칠을 두고 줄기차게 비가 내렸다. 며칠 째 알 수 없는 불안에 시달리던 미선은 간밤엔 거의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날씨 탓이려니’ 하늘을 보았다. 여전히 하늘은 온통 잿빛으로 찌푸려 있었다. 그러던 중 미선은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저 혹시…, 박은숙씨 알고 계십니까?”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미선의 가슴은 방망이질 쳤다.

“네 알고 있습니다만, 어디신지요?”

“여기는 경찰서입니다. 좀 확인해 볼게 있어서요.”

“경찰서요? 무슨…, 일인데요?”

“박은숙씨가 교통사고로 의식불명이십니다.”

“…”

“박은숙씨 휴대폰에 이 전화번호가 많이 찍혀 있어서…, 박은숙씨와는 어떤 사이입니까?”

“친…구입니다만, 어쩌다가…아니, 지금 어느, 병원에…”

미선은 가슴이 떨려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일단 진정하시고 적십자병원 응급실로….”


남자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허공에서 들려왔다. 그 소리는 너무 메마르고 공허해서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미선이  급히 병원 문을 들어서는데 한 남자가 다가왔다.


“미선누나? 나 성식이야, 나 모르겠어? 왜 은숙 누나 동생…”

“으응…, 그래 누나는? 누나는 어때?”

“…”

“성식아! 말 좀 해봐”

“누나는 조금 전에…”


잠시 그쳤던 비가 영안실에 도착하자 다시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은숙의 단 하나의 혈육인 남동생과 그의 처가 쓸쓸히 빈소를 지키고 있었다. 화환 하나 없는 초라하고 횅한 방 한 편에 덩그러니 놓인 사진, 그 속에서 그녀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미선은 갑자기 속이 메슥거리며 어지러워 휘청거렸다.


“미선누나, 누나, 정신 차려!”

“으응, 괜찮아,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갑자기 당한 일이라서, 우리도 뭐가 뭔지 모르겠어.”

“미국에서 잘 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미국? 가긴 갔었지,  그런데 바로 돌아왔어.”


미선이 은숙을 처음 만난 것은 중학교 때였다.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북한산 끝자락에 위치한 J 여중으로 전학을 왔을 때 이 곳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미선에게 은숙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단 한 명의 친구였다. 내성적이고 조용한 미선에 비해 힘든 상황에서도 은숙은 항상 밝고 명랑했다.  둘은 금세 친해졌고, 고등학교에 가서도 늘 붙어다녔다.


서울이지만 변두리에 위치한  마을은 주위가 아담한 산으로 둘려 싸여 유난히 아카시아 나무가 많았다. 오월이 되면 아카시아가 하얗게 산을 뒤덮고 그 향기에 온 마을이 취했다. 미선과 은숙은 학교가 끝나면 자주 산에 올라갔다. 그들은 마을이 한 눈에 보이는 산 중턱, 아카시아가 소담스럽게 피어있는 나무그늘에 앉았다. 하늘이 파란 유리알처럼 투명한 오후였다. 어디선가 휘바람새 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미선아, 나…, 어쩜 대학진학을 포기해야 할 것 같아.”

은숙은 일어서서 꽃잎이 주렁주렁 달린 아카시아 가지를 뚝 잘랐다.

“…”

미선은 시무룩해져 은숙의 손에 있는 아카시아 가지를 만지작거렸다. 꽃잎을 따서 저 멀리 던져보지만 꽃잎은 이내 미선의 발아래 힘없이 스러진다.

“바보같이, 멀리도 못 가잖아?” 미선은 괜스레 꽃잎을 발로 문질렀다.

“야! 무슨 큰일이 났다고 울상이냐? 나 신경 쓰지 말고 너나 잘 해!”

은경 특유의 명랑함이 배어 있는 말투였다.

“은숙아, 네가 마음 상할까봐 망설였는데, 우리 아빠한테 네 사정 말씀드려 볼게.”

미선이 힘들게 입을 열었다. 그 당시 미선의 아버지는 고위 공무원으로 있었다.

“그건 절대 안 돼! 내 신조가 뭔지 알아? 그건…, 분수를 지키는 거야.”

“그렇지만, 너는 충분히 대학 갈 자격이 있어, 왜 그 재능을 포기하려는 거야?”

은숙은 공부도 잘 하지만 매우 영특했다. 그녀는 초등학교 때 엄마를 잃고, 어린 나이에 사업하는 아버지 뒷바라지에 동생을 보살피면서도 성적은 항상 상위권이었다.

“더 이상 그 얘긴 하지 말자!”

“……”

너무도 단호한 은숙의 말에 미선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저녁놀이 마을을 붉게 물들이며 사라지는 광경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어둠이 고요 속에 침잠하여 마을의 풍경을 하나하나 지울 때까지 한 참을 앉아 있었다.

“미선아, 나 너한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

“…”

“너 아카시아 꽃말이 뭔지 아니?”

“사랑과 우정이래, 나 아까부터 이 나무 아래서 너와 어떤 의미 있는 정표, 뭐 서약식이랄까? 그런 걸 주고받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


어둠 때문에 잘 볼 수 없었지만 은숙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미선은 느낄 수 있었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에 아카시아 나무들이 술렁거렸다. 나무가 흔들릴 때마다 짙어지는 아카시아 향에 미선은 질식해버릴 것 같았다.


“미선아! 난 네가…, 너는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나의 한 부분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 은숙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우리 앞으로 자주 못 만난다 해도, 마음만은 늘 함께 있는 거야. 이 나무 아래서, 아카시아 꽃말처럼 우리 우정을 맹세하자!”

“응…, 하지만 자주 못 만난다는 말은 하지 마!”

미선은 형용할 수 없는 슬픔에 가슴이 저려왔다.

“자, 우리 우정을 위해!”

은숙은 손에 들고 있던 아카시아 꽃잎을 입안에 넣었다. 그리고 하나 따서 미선에게 내 밀었다.

“자, 너도…”

“응”


미선은 하얀 꽃잎을 살짝 혀끝에 올려놓고 맛을 보았다. 잎의 부드러운 감촉과 달짝지근한 맛이 입 안 가득 느껴졌다. 바로 그 때 누구랄 것도 없이 그들은 서로 마주보며 살짝 입을 맞추었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었지만, 미선은 그것이 분명 둘 사이에 어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의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신비하기까지 한 어떤 느낌, 꿀보다 달콤하고 향기로운 교감은 그들의 영혼 깊은 곳을 흔들어 깨우는 듯하였다. 정말 그랬다. 미선은 은숙이 자신의 한 부분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 뒤 미선은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고, 은경은 가족과 함께 지방으로 내려갔다. 그 곳에서 작은 회사에 취직했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은숙은 미선에게 자신이 사는 곳을 알려 주지 않았다. 미선은 왜 은숙이 자신에게 그녀가 있는 곳을 알려주지 않았는지 한 참을 지나서야 알 수 있었다.


그 때 은숙은 대학을 포기해야 할 만큼  집안이 기울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사업에 실패한 후 현실을 극복하지 못하고 술주정뱅이가 되었다. 일찍이 엄마를 여윈 은숙은 남동생과 아버지를 보살피기 위해 가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대학을 포기하고 돈을 벌면서 은숙은 삶에 찌든 자신의 모습을 미선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몇 번의 편지를 끝으로 그녀는 소식을 끊어버렸고, 그 후 미선은 친구를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행방을 알 수 없었다.


시간이 흘러 미선도 자신의 삶 속에 천착하여, 그녀와의 추억은 퇴색된 사진처럼 마음 한 구석에 희미하게 묻혀가고 있었다. 미선의 꿈은 작가였다.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하였고, 신춘문예에 응모해 몇 번 낙선 끝에 당선되었다.


미선은 한 지방대학의 강사자리를 제안 받고 망설임 끝에 작품구상에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하고 가기로 결정했다. 미선을 실은 열차는 베일에 가려진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달리는 그녀의 삶과도 같이 새벽의 희미한 안개 속으로 미끄러져 가고 있었다.


오월의 캠퍼스는 싱그러운 향기로 가득 하였다. 캠퍼스를 둘러싼 산의 솔향기와 어우러진 젊음은 더욱 풋풋하고, 활짝 핀 함박꽃은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온갖 꽃들이 미선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은은히 퍼지는 향기에 취한 듯 도서관 뒤의 작은 오솔길로 향했다. 그 길 양편으로 하얀 아카시아와 보랏빛 라일락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알 수 없는 그리움이 봇물처럼 쏟아져 뜨겁게 미선의 볼을 타고 흘렀다.


은숙과의 재회는 정말 우연한 자리에서 이뤄졌다. 같은 과 교수진과 몇몇 강사들의 회식이 있던 날, 식사를 마치고 이차로 술집을 가게 되었다. 방석집에서 미선은 머리를 단정히 틀어 올리고 한복을 곱게 입은 은숙을 보았다. 처음 미선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은숙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은숙은 미선보다 차분했다. 미선을 알아보고도 별 내색 없이 할 일만 했다.


미선은 놀란 마음을 추스리기 위해 일행을 뒤로하고 그 자리를 빠져 나왔다. 그리고 망설이며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을 때 은숙이 나타났다. 미선이 자리를 비우자 곧 뒤따라 나왔던 것이다. 그들은 잠시 얼굴만 쳐다보다 이윽고 미선이 은숙에게 따로 만나자는 제안을 했고, 약속 날을 정한 후 헤어졌다.


조용한 찻집, 미선과 은숙은 마주 앉았다. 시간의 장벽이 둘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니?” 미선이 먼저 입을 뗐다.

“보다시피 이렇게 살아.” 몹시 냉소적인 말투이다.

“보고 싶었어. 어떻게 지내는지 늘 궁금했고…”

“응, 나도 네 생각 많이 했어.”

그동안 고단한 삶을 살아 온 듯 피곤에 지친 그녀의 눈가가 촉촉이 젖는다.


미선은 은숙의 삶이 매우 불행했다는 것을 알았다. 작은 회사에 다니면서 한 남자를 알았고 둘은 결혼을 약속했다. 그러나 그 남자는 술주정뱅이 아버지를 부양하고 아직 학생인 동생의 학비를 벌기위해 동분서주하는 그녀를 부담스럽게 생각하게 되었고, 결국 다른 여자와 결혼해 버렸다. 그 뒤 아버지가 비명횡사하는 슬픔을 겪었고, 절망한 나머지 자포자기 심정으로 술집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다행히 동생은 학교를 졸업하고 제 밥벌이는 할 수 있게 되었다.


지방에 있는 동안 미선은 은숙을 몇 번 만났다. 서로의 생활이 너무 달라 예전처럼 함께 공유하는 일이 별로 없었지만 미선은 상처받은 은숙의 마음을 따뜻하게 보듬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무슨 일 때문인지 은숙은 미선을 피했고, 어느 날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춰버렸다.


당시 대학가에서는 독재 정권에 대항해 민주화운동이 점점 과격해지고 있었다. 벽보를 붙이고 구호를 외치는 평화적이고 소극적인 형태에서 공권력 진압 강도에 따라 점점 더 많은 학생들이 참여하게 되고,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돼 급기야 유혈사태가 발생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많은 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지고, 어느 지방에선 계엄령이 선포돼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흉흉한 소문이 떠돌고 있었다. 미선은 진보적 사상을 갖고 있었지만, 사회 비판적 작품보다 순수 문학을 지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 상황을 묵고할 수 없다는 분노가 치밀어 오르곤 했다.


미선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은 사건은 느닷없이 찾아왔다. 은숙이 자취를 감춘지 꼭 일년 째 되는 오월 어느 날, 은숙이 연락을 해왔다. 은숙은 아기를 안고 있었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깃털처럼 보드랍고 가녀린 생명이 은숙의 품속에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이 아기는?”

“미선아, 아기를 잠시 맡아 줄 수 없겠니?”

“은숙아, 어떻게 된 건지 자세히 설명 좀 해 봐! 그동안 어디에 있었어?”

“이 아기 내 아기야, 아기 아빠는 미국에 있어, 그래서 그일 만나러 가려는데, 아기가 너무 어려서 데려갈 수 없어.  네가 잠시만 맡아주면 그 은혜는 평생 잊지 않을게. 믿고 맡길 데가…, 너 밖에 없구나.”

“……”

“미선아, 제발!”


그때, 미선은 도저히 거절할 수 없었다. 당시 아이를 맡을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그런 결정을 한 것을 떠올릴 때마다 그녀는 ‘만약 운명이라는 게 있으면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하곤 했다.


그 후 아이를 맡기고 간 은숙으로부터 몇 통의 편지를 받았다. 그 중 한 통은 매우 심각하고 의미심장하였다. 미국에서 아이 아빠를 찾았지만, 결국 찾지 못했고 자신을 아껴주는 미국인과 결혼할 거라는 내용이었다. 또 아이 이름을 미선이 네가 지어주었음 좋겠다는 것, 결혼하면 미국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엄마 자격이 없으며, 너라면 좋은 엄마가 될 수 있겠지만, 사람으로서 차마 네게 부탁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미선은 이 내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한 참을 고민하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마지막으로  보내온 편지에 찍힌 소인은 미국이 아닌 서울의 한 지역으로 돼 있었다. 그걸 의식해서인지 편지 끝머리에 자신의 동생에게 부탁해 편지를 보내는 거라고 쓰여 있었다. 미선은 이상했지만,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아이가 크면서 법적으로 처리할 것이 많아졌다. 은숙에게 이 문제를 의논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반송돼 돌아왔다. 세월이 흘러 그 아이는 미선의 전부가 되었다. 그 동안 어린 핏덩이를 결혼도 안 한 처녀의 신분으로, 주위의 차가운 시선과 의심의 눈초리를 받으며 힘들게 키웠지만 미선은 그 아이로 인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주위의 편견 속에서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지혜롭게 극복해 왔다. 그리고 지금 그 아이는 누구보다 소중한 미선의 딸이 되었다.

미선은 사회에서 말하는 싱글 맘이다. 시대가 변해 지금은 어느 정도 다양성을 인정하는 분위기라 모녀의 삶은 그리 낯설지 않았다. 당당함과 자신감이 넘치는 미선으로서는 사회적 제약이나 시선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미선에게 두려운 문제는 ‘아이에게 이 모든 상황을 어떻게 상처주지 않고 이해시킬 수 있는가’였다.


미선은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늘 생각해 왔다. 은숙이 미국에서 좋은 짝을 만나 잘 살 것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 미선에게 은숙의 죽음은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누나 장례는 잘 치렀지? 장지까지 가지 못해 미안해.”

“아니, 누나는 할 만큼 충분히 했잖아. 은숙 누나는…, 누나를, 그 아이,”

성식은 말끝을 맺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네가 어떻게 그 아이를 알지?” 순간 미선은 둔탁한 무엇으로 머리를 맞은 것 같았다.

“누나, 사실 은숙 누난 미국에서 돌아와 줄곧 병원에 있었어. 그동안 우울증 치료를 받아서 많이 좋아진 줄 알았는데, 또 퇴원을 간곡히 부탁해서…, 거절했어야 했는데!”


성식이 들려 준 죽기 전 그녀의 삶은 대충 이러했다. 그녀가 술집에 있을 때 당시 민주화운동을 하던 대학생을 우연히 만나게 되고, 수배자인 대학생을 자신의 거처로 데려와 숨겨 주었다. 그의 도피생활이 길어지면서 그녀는 그를 사랑하게 되었고, 술집을 나와 공장에 취직하게 되었다.

 그녀는 대학생으로 인해 사회를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고, 공장의 노동조합에 가입해 노동운동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다 임신을 하게 되고 아이를 낳았지만, 얼마 못가서 아이 아빠는 안기부에 끌려가고 그녀도 조사를 받게 되었다. 그 후 그녀는 곧 나왔지만, 대학생은 고문을 받고 한동안 감금됐다가 풀려났다. 그 뒤 얼마 안 돼 아이 아빠는 결국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극단적 선택을 하였다. 그 일로 은숙은 큰 충격을 받고 남자의 누나가 있는 미국으로 갔다. 그런데 그곳에서 병이 더 깊어져 일년도 채우지 못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미선은 이제야 은숙이 자신에게 갓난 아이를 맡길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이해하게 되었다. 미선에게 아기를 맡길 때 형사에게 쫓기고 있었던 그들의 신변은 매우 불안정했기에  아이를 키울 수 없었던 것이다.

은숙의 죽음은 교통사고로 처리됐지만, 많은 의문이 제기되었다. 유족에게 전달된 소지품에서 작은 메모장이 발견되었다. 몇 줄의 짧은 글인데, 성식은 그 내용을 전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그 글은 단 한 사람, 함께 비밀을 간직한 미선만이 알 수 있는 것이었다. 메모장에는 단편적인 낱말들이 무질서하게 적혀 있었다. 그 단어들은 이십년 전 아카시아 나무 아래서 두 친구가 함께 했던 추억을 상기시키는 것들이었다.

미선은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몇 달 전부터 전화가 와서 받으면 뚝 끊어버리는 일이 자주 있었다. 직감적으로 느껴지는 바가 있었지만 설마 했었다. 하지만 항상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이제야 의문이 하나로 연결되면서 그 불안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얼마나 보고 싶고, 그리웠으면…, 바보 같으니라고!’

미선은 깊은 상념에서 깨어나 숨을 가다듬고 딸에게 쓰던 편지를 다시 써 내려갔다.


「사랑하는 딸아! 엄마에겐 소중한 친구가 있었다. 우리는 늘 함께 하기로 맹세했었어. 하지만 엄마는 그 친구가 슬프고 힘들 때 함께 있어주지 못했구나. 그 친구는 많이 아팠단다. 그래서 조금 먼저 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지. 그러나 그 친구는 이 세상에 아름다운 씨앗을 뿌리고 갔단다. 지워지지 않는 향기를 심어주고 갔지. 그게 바로 우리 딸이구나. 그래 많이 놀랐을 거야, 연지야! 언젠가 네가 물었지? 우리는 왜 아빠가 없냐고, 딸아! 이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지만, 얼굴이 다 다르듯 사는 방법도 다 다르단다. 하지만 누구나 가족을 이루고 살지, 누구와 사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족으로 함께 살아간다는 사실 아닐까? 사랑하는 딸아! 너에게 엄마의 비밀을 고백할 수 있게 용기를 준 것도 그 친구란다. 너의 생모, 박은숙이란다.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이해하기에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지, 하지만 사랑하는 딸아, 이것만은 항상 기억해다오. 목숨보다 소중한 그 무엇을 함께 공유하는 사람들은 생사를 초월해 늘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목숨보다 더 소중한 그 무엇이 바로 너라는 사실을…」


여기까지 쓰고 미선은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았다. 창틀에 작은 새 한 마리가 앉았다가 포로롱 날아간다. ‘은숙아! 부디 좋은 곳으로 저 새처럼 훨훨 날아가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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