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명종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놀라 잠을 깬 연지는 이곳이 한국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왠지 모를 허탈감에 다시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웠다. 미국에서 돌아온 후로 연지는 생활의 리듬을 찾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 그동안 받아들이기 힘겨운 사실들 앞에 강한 척 한 것이 무리였을까? 연지는 자연히 솟아오르는 감정의 질곡 앞에 몸살을 앓고 있었다.
연지가 엄마의 편지로 인해 생모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 그녀의 나이 17세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당시는 별로 실감을 못 하고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자라면서 자신의 출생에 대해, 남들과 다른 가족구성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었지만 결코 불행하다고 여겨본 적이 없었다. 설사 지금의 엄마가 생모가 아니라 해도 자신에겐 달라질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 사실은 믿기 어려운 현실로 그녀에게 인식되었다. 자신의 정체에 대해 혼란을 느끼며, 무엇이 진실인지 직접 확인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다.
연지는 우울한 상념에서 벗어나려는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방을 나와 부엌으로 갔다. 식탁에는 정성이 담긴 식사가 준비돼 있었다.
<연지야! 잘 잤니? 요즘 너무 피곤해 하는 너를 보니 엄마가 마음이 아프구나. 밥 많이 먹고 빨리 원기를 회복해서 명랑한 우리 딸로 돌아왔으면 좋겠다. 그럼 학교 잘 다녀오고 이따 보자~> 연지는 엄마의 다정한 필체를 보니 눈물이 핑 돌았다.
연지는 대학 4학년이다. 그동안 많은 변화를 겪은 탓에 나이보다 더 성숙해진 것 같았다. 풍부한 표정을 담고 있는 크고 깊은 눈은 짙은 우수의 그늘을 지녔다. 언젠가 미선은 연지의 눈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마치 은숙의 눈을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연지가 미국에서 돌아 왔다면서요?”
성식의 굵은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흘렀다.
“응, 연지에겐 꼭 필요한 시간이었을 거야.”
“혹 깊은 상처라도 받지 않았는지, 걱정이 됩니다.”
“어차피 자신의 뿌리를 확인하기 위해 스스로 극복해야 하는 과정이잖아.”
미선은 자신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쉬었다.
“연지가…, 미국에 고모가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연지가 낳아준 부모에 대해 알고자 하는 욕망은 어쩌면 자신의 내부에 숨은 또 다른 자신을 느낄 때 더욱 강렬해진 듯했다. 미선의 각별한 보살핌 속에 자라온 연지였지만 어쩔 수 없는 결핍은 채워지지 않는 공허와 우수의 정서로 연지의 마음 한 편에 자리 잡았다. 특히 연지의 풍부한 감수성은 신비스러울 정도였다. 한 번은 미선이 어린 연지를 데리고 등산을 간 적이 있었다. 겨울의 끝에서 봄으로 가는 길목, 아직 나무들이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고, 주위에 낙엽들이 쌓인 황폐하고 메마른 산길이었다.
“엄마 저것 좀 봐.”
연지는 가다말고 어느 한 곳을 가리키며 다가갔다. 연두색의 작은 풀잎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응, 아직은 이른 것 같은데, 봄이 가까이 오긴 왔구나.”
둘은 가만히 앉아 그 풀잎을 들여다 보았다.
“하지만, 아직 추운 걸.”
연지는 마치 자신이 추운 것처럼 작은 잎을 애처롭게 바라보더니, 자신이 두르고 있던 머플러를 작은 풀잎에 덮어 주었다.
“엄마, 아기들은 약해서 누군가 보살펴 주어야 해. 이 작은 잎도 아기니깐 보호해 줘야지.”
순간 미선은 어떤 놀라움에 전율했다. 자신의 출생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를 텐데, 마치 아이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 그 감정이 생생히 전해지는 것이 아닌가! 미선은 자신의 자격지심이라 생각했지만, 그때의 신비한 느낌은 결코 잊을 수 없었다.
살면서 미선은 연지의 섬세하고 예민한 감수성에 대해 경탄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 타고난 성향은 늘 책을 가까이하고 창작 활동을 하는 미선에 의해 연지를 정서적으로 더욱 풍부하고 사려 깊은 아이로 자라날 수 있게 하였다.
연지가 미선에게 자신의 부모님에 대해 묻기 시작한 것은 대학을 들어가서 얼마 안 되었을 때부터였다. 한 여름의 더위가 극성을 부리던 어느 날, 귀가가 늦어진 미선은 발길을 재촉하여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집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 아파트 창문을 바라보니 불이 꺼져 있었다. ‘아직 연지가 오지 않았나?’ 걱정스런 마음으로 급히 문을 열고 들어서자, 열려진 창문 사이로 축축하고 더운 바람이 밀고 들어왔다. 미선은 희미한 달빛 아래 춤추는 낯익은 실루엣들 사이로 꼼짝 않고 앉아 있는 연지를 발견하고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 연지야 ! 너 왜 불을 켜지 않고…,”
어스름한 달빛이 촉촉이 젖어 빛나는 그녀의 눈을 부드럽게 훑고 지나갔다.
“엄마, 놀라게 해서 죄송해요. 하지만 오늘은…, 엄마 불은 켜지 마세요!”
“……”
“꼭 여쭤 볼 말이 있어요.”
“무슨 말인데?”
연지는 한 곳을 응시하더니 이내 머리를 숙였다. 미선은 연지에게 다가가 다정하게 손을 잡았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니?”
“엄마! 제 부모님은 어떤 분들이셨어요?”
너무 당차고 단도직입적인 연지의 물음에 순간 미선은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엄마, 전 단지…, 저를 낳아준 분들이 어떤 분들이실까…, 정말 슬퍼요. 이렇게 다정하고 좋은 엄마가 계신데, 왜 나는 외로울까요. 정말 죄송해요!”
미선은 가슴이 저려왔다. 연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연지야! 나한테 미안할 필요 없단다. 네가 친부모님에 대해 궁금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야.”
미선은 고통스럽게 흔들리고 있는 연지의 가냘픈 몸을 꼭 안아주었다.
“괜찮아, 엄마는 다 이해한단다.”
미선은 연지에게 그녀의 부모에 대해 알고 있는 만큼만 얘기해 주었다. 사실 미선은 그들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친구인 은숙에 대해선 어릴 적 함께 했던 학창시절과 잠깐의 만남, 성식이 들려준 이야기를 통해 단편적이나마 알 수 있었지만, 연지의 생부와 관련된 것은 아예 알 도리가 없었다.
미선은 연지가 자신에게 들은 사실로는 절대 만족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성식에게 ‘자신을 찾아와 친부모에 대해 묻더라’는 말을 들었을 때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
연지가 자신의 친부모에 대해 엄마와 삼촌에게 들을 수 있었던 이야기는 대강 이러했다. 생모는 엄마의 절친한 친구였으며, 총명하고 아름다웠고, 무척 다정다감했다는 것, 외할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집안이 어려워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생활전선에 뛰어 들어야 했고, 그러던 중 생부를 만나 자신을 낳았다는 것 정도였다.
연지의 고민과 갈등은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깊어졌다. 그럴수록 지금 자신의 위치가 얼마나 행복하고 과분한지, 이렇게 고민하고 갈등하는 자신이 얼마나 바보 같고 어리석은지 뉘우치고 자신을 친자식 이상으로 아끼는 엄마를 절대 배반하지 말자고 다짐하곤 했다. 그러나 모든 걸 잊으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친부모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은 더해만 갔다.
연지는 엄마에게 더 이상 슬픔을 줄 수 없었다.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슬픔과 절망을 피하지 말고 당당히 맞서야 한다고 생각했다.연지는 여름방학을 이용해 생모가 살았던 곳을 찾아보기로 하였다.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네 시간가량 걸려 도착한 지방의 작은 마을이었다. 삼촌이 알려준 주소로 찾아간 그곳은 제법 큰 한식집이었다.
성식은 연지의 집요한 물음에 알고 있는 사실을 전부 말해 줄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누나가 어떤 일을 했는지 그도 잘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학비를 대기 위해 희생했던 누나의 일을 애써 모른 척 했던 성식이었기에 다시 그 기억을 돌이키는 일은 매우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성식은 연지에게 그 방석집 이름과 누나와 절친했던 여인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누나가 그곳에서 일했던 이유는 불행한 가족을 절망 속에서 구해내기 위해서였다며 울먹였다
연지는 한 여인과 조용한 카페에 마주 앉았다. 오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그녀는 인상이 후덕해 보였다.
“저, 바쁘신데 이렇게 불쑥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연지는 조용히 상대를 바라보며 고개를 숙였다.
“아가씨는 그 친구를 참 많이 닮았군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그윽하게 연지를 바라보았다.
“예쁘게 잘 자랐구나, 네 엄마가 너를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아주머니, 아시는 대로 저의 생모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네 엄마와 나는 처음 직장 동료로 만났지. 나이도 동갑이고 무엇보다 처지가 비슷해 우린 금방 친해졌어. 그런데 잠시 다니던 회사가 부도가 나는 바람에 우린 당장 생계 걱정을 해야 했다.”
여인은 잠시 기억에 잠긴 채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린 함께 이곳에서 일하게 됐다. 지금은 내가 이곳을 인수해 한식집으로 바꿔 운영하고 있지만.. 아무튼 그때는 네 엄마나 나처럼 가난한 서민들은 모두 궁핍하고 추운 시절을 보냈지. 더구나 네 엄마는 한 번 실연을 겪고 무척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아빠는 어떤 분이셨나요?”
“네 아빠는 당시 대학생이었다. 지금의 네 또래 쯤 됐을 것 같다. 그렇게 잘 생기고 당당한 대학생이 왜 그런…, 지금은 세상이 바꿔서 대통령도 대놓고 욕하는 세상이 되었지만, 그때는 달랐지. 우리처럼 먹고 살기 힘든 사람들은 비싼 돈을 들여 대학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공부는 안하고 데모다 뭐다 하며 왜 나라를 시끄럽게 만드나 했다.”
“엄마는 어떻게 아빠를 만나셨나요?”
“네 엄마가 대학가 근처 식당에 갔다가 최루탄에 맞고 쓰러져 있는 네 아빠를 보고 그냥 지나치지 못해 집으로 데리고 가 치료해 주었다고 들었다. 인연인지 악연인지 모르겠다. 너를 앞에 두고 이런 말은 하지 말아야 하지만, 네 아빠만 아니었으면, 네 엄마가 그토록 허무하게ᆢ.”
여인은 고통스런 표정으로 말을 계속 했다.
“오해는 말아라. 네 엄마는 네 아빠를 진심으로 사랑했으니 분명 후회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네 아빠가 안기분가 뭔가 끌려갔다가 반병신이 돼서 나온 걸 보고 네 엄마도 반은 미쳤다. 그런데…”
여인은 차마 말이 떨어지지 않는 듯 머뭇거리며, 침통한 표정으로 연지를 바라보았다.
“다 말씀해 주세요. 부탁드려요 말씀하시기 힘든 것 이해해요. 하지만 꼭 알아야 해요. 아줌마!”
“그래 말하마. 이제 와서 숨길 일도 아니지, 네 아빠는 거기 갔다 나와서 하루 종일 소주만 마셨다고 한다. 그리고 한 밤 중에 산으로 들어가 그만…, 다음 날 새벽에 등산객이 발견했다고 하더라.”
여인은 말을 마치면서 연지가 충격을 받았을 거라 생각하고 조심스럽게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하지만 생각과 달리 연지는 냉정을 잃지 않고 차분히 여인을 바라보았다. 여인은 좀 망설이다가 핸드백에서 낡고 빛바랜 사진 한 장을 연지에게 내밀었다. 사진 속에는 두 여자와 한 남자가 강이 흐르는 다리 난간을 배경으로 서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너의 부모님과 내가 함께 찍은 단 하나의 사진이란다.”
“이분들이 제 부모님이군요.”
사진 속 아름다운 여자는 젊고 잘 생긴 남자를 바라보며 눈부시게 웃고 있었다.
“사실, 내가 올바른 판단을 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 참! 아직 이름도 모르고 있었네. 이름이…?”
“연지예요, 박 연 지”
“연지야 이 건 네 엄마가 미국에서 나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다. 참! 너의 아빠에겐 누나가 있었는데 미국 LA에 산다고 들었다. 네 엄마가 잠시 그곳에 갔었지. 이 편지를 끝으로 너의 엄마와 연락이 끊겼다.”
그녀는 오래돼 꾸깃꾸깃한 편지 한 통을 연지에게 주었다.
“그럼 엄마가 한국에 돌아오신 것은 모르셨나요?”
“아니 한국에 돌아온다는 것은 편지로 알았는데, 한국에 와서 나에게 왜 연락을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구나. 그런데 어느 날, 정말 믿지 못할 전화를 받았지. 너의 삼촌이 엄마의 죽음을 알려주더구나.”
여인은 복받치는 감정을 억누르는 듯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내뱉었다.
미선은 언제부턴가 연지의 얼굴에 그늘이 짙어지는 것을 보며 답답하고 불안한 마음을 누를 길 없었다. 그렇게 다정다감하던 아이가 혼자 생각에 잠기는 날이 많아지고 대화도 피하고, 자신조차 피하는 느낌이 들어 불안했다.
미선은 연지를 위하는 길이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동안 최선을 다해 키웠지만 혹여 자신의 사랑과 정성이 부족했는지, 아빠의 부재에서 오는 결핍인지 모르지만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책임인 것 같아 괴로웠다. 연지 또한 엄마의 표정이 전과 같지 않게 우울하다는 것을 알았다. 모든 게 자신 탓이라 생각하니 엄마의 얼굴을 바로 볼 수 없었다.
평행선처럼 좁혀지지 않는 감정의 줄다리기에 지친 미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연지야, 엄마는 네가 무슨 말이든 숨김없이 해 주리라 믿고 있다. 우린 모든 어려움을 항상 대화로 풀어 왔잖니?”
“……”
“엄마는 너의 모든 걸 이해할 준비가 돼 있어. 그러니 너도 마음을 열고 얘기 해 보렴.”
잠시 무거운 침묵이 둘 사이를 가로 막았다. 이어 무언가 결심한 듯 꽉 다물어졌던 연지의 입이 서서히 풀렸다.
“엄마, 제 부모님에 대해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들의 운명이 너무 슬프고 가혹해서 믿어지지 않아요.”
오열하는 연지의 모습에 미선은 너무 당황하고 놀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연지야,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울고 싶은 만큼 울어라.”
연지는 한 참을 엄마 품에 안겨 울었다. 미선은 연지가 성장하는 동안 이렇게 많이 울었던 적이 없었기에 내심 놀란 가슴을 진정하기 어려웠다. 실컷 울고 난 뒤 어느 정도 차분해진 연지는 여인을 만나 들었던 이야기를 미선에게 전해 주었다.
“그랬구나, 많이 놀랐지?”
미선도 놀라 방망이질하는 가슴을 누르고 침착하려 애를 썼다.
“알고 나니 후련하긴 한데…”
연지의 낯빛이 흐려졌다.
“그래 네 맘 다 안다. 나한테 조금도 미안할 것 없다.”
연지가 미국행을 결심하게 된 것은 엄마의 깊은 사랑과 배려 때문이었다. 상처는 덮어둘수록 깊어지는 법, 환부가 곪아 더 큰 상처로 퍼지기 전에 당장은 쓰리고 아플지라도 그 상처를 직시하고 스스로 치유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생모가 거쳐 갔을 고통과 절망의 자취를 연지가 조금이라도 느끼고 이해한다면 그토록 무거운 마음의 짐을 조금은 벗어 놓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마침 운 좋게 연지는 생모가 머물던 도시에서 멀지 않은 한 대학의 교환 학생으로 가게 되었다. 미선은 연지를 미국으로 보내면서 진정한 사랑이 어떤 것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고통쯤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는 것, 아니 오히려 그러한 고통도 행복으로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은숙의 연지와 연지 아빠를 향한 마음도 자신과 똑같았을 것이다.
일 년의 세월은 미선의 삶에서 가장 외롭고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 연지를 가까이서 볼 수 없다는 현실과 이국땅에서 변화의 삶을 살아가는 연지에 대한 염려와 불안이 그녀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연지로부터 편지를 받는 순간만큼은 모든 불안과 고통이 사라졌다.
편지에 의하면, 현지에 잘 적응하고 학교생활도 열심히 하며 친구들도 많이 사귀었다고 했다. 편지 내용은 늘 밝고 진취적이었지만, 미선은 틈틈이 행간에 숨은 연지의 마음을 읽곤 했다. 수십 통의 편지가 오가고 수십 번의 통화를 하는 사이 시간은 쉼 없이 흘러 연지가 한국에 돌아오게 되었을 때 미선은 마치 긴 꿈에서 깨어난 듯 한껏 기지개를 켰다.
연지는 미국생활에서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느꼈다. 한국에 있을 때와 달리 시간이 너무 짧게 느껴져 아쉬움마저 들었다. 연지는 새로움이 이토록 가슴 설레게 만드는 것인지 새삼 느꼈다. 연지는 한국을 떠날 때만 해도 자신도 알 수 없는 어떤 것, 잠재의식 속에 내재돼 있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우울한 부정이 조신하고 침착한 외모에 의해 은밀히 감춰져 있으며, 자신이 열정과 기대에 들 떠 희망에 전율하는 모습을 애써 부정하며 책망하는 습관에 길들여져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미국에 도착해 며칠은 새로운 문화와 사람들에 둘려 쌓인 현실이 실감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연지는 새로운 모든 것에 호기심을 가졌고,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이 해야 하는 일들을 차근차근 짚어보고 계획을 세워나갔다.
우선 그녀는 문화적 이질감과 의사소통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영어공부를 열심히 했다. 이 나라를 이해하고 적응하기 위해 역사와 사회에 관련된 서적을 탐독했다. 그리고 좋은 강의는 빠지지 않고 찾아다니며 들었다. 그러는 사이 자신도 모르게 충격과 우울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었다.
연지의 고모는 한인 타운에서 제법 큰 식당을 하고 있었다. 연지를 처음 봤을 때, 자신의 동생과 너무 닮아서 그녀가 자신의 조카인지 한 눈에 알아봤다. 연지는 고모를 통해 생모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고모의 정성과 친절에도 은숙은 향수병이 심해져 결국 한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연지는 생모가 왜 그토록 한국을 그리워하고 잊지 못했는지 알 것 같았다.
연지가 다니는 학교 기숙사 뒤에는 푸른 숲과 호수가 어우러진 큰 공원이 있었다. 연지는 이곳에서 산책을 하며 책을 읽고 사색에 잠기곤 하였다. 수업이 없는 휴일에는 가끔 친구들과 야외로 소풍도 가고 파티에 참석도 하였지만 그녀의 조용한 성향은 시끄럽고 활기찬 곳보다 홀로 사색할 수 있는 장소를 찾게 만들었다.
연지는 자주 찾는 공원에서 태어난 그대로가 집인 채 살아가는 나무, 세월과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나무들을 보며 인생의 깊이를 느끼곤 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 그 앙상한 가지를 비집고 솟아나던 여린 싹, 그리움처럼 짙어가는 초록의 물결, 떨어지는 잎의 외로움, 앙상함, 무, 이것이 인생의 메타포임을 깨닫는 것이었다.
연지는 문득 그렇게 확인하고 싶었던 생부와 생모의 존재가 어쩌면 자신의 이기적 마음이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진정으로 그들을 그리워하며 사랑했는지, 진실과 대면하고 싶었다.
그 많은 세월을 서로 알지 못한 채 살아오지 않았나, 이제 와서 다만 혈육이라는 이유만으로 이어진 인연의 끈이 결코 끊지 못할 만큼 질긴 것이라고 어느 누가 단언할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향해 울고불고 하며 세상의 폭력과 행패 앞에 땅을 치고 원망하며 절망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오히려 현실의 냉혹함을 느낄 뿐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그 뿌리가 얼마나 튼튼한지 또는 나약한지 그녀 자신을 시험대에 올려놓고 적나라하게 해부하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그들은 그녀에게 생물학적 육체를 주었고, 숨을 쉴 때마다 그 사실을 각인시켜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영혼 속에 존재하는 그들은? 기억에 없다. 따스한 손길도, 다정한 음성도, 익숙한 숨소리도, 모습도 기억할 수 없다. 기억할 수 없는 것들을 어떻게 그리워하고 사랑하고 존경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 아름답고 생생한 삶의 기억과 향기는 지금의 엄마로부터 받은 것이다. 연지는 뜨거운 감동과 기쁨의 전율에 온 몸을 맡기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