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지개 경 Sep 16. 2018

박완서의 [나목]

「나목」은 작가 박완서의 처녀작이며 자전적 소설이다. 제목을 통해 추운 겨울 황량한 벌판에 우뚝 선 벌거벗은 나무처럼 지난하고 참담한 시대를 살아가지만 고목이 아니기에 언젠가 반드시 싹이 돋고 잎이 날 거란 희망의 메시지를 감지할 수 있었다.

작품은 작가의 체험적 삶을 바탕으로 당시 역사적 사회적 환경이 개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전쟁의 공포가 인간 심리를 어떻게 자극하고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지 가감 없이 전하고 있다. 작가의 꾸밈없고 소탈한 문체 이면에 전쟁에 대한 증오와 강한 비판의 어조를 느낄 수 있었다. 주인공 이경은 잔인한 시대를 경험했던 작가의 분신이며, 비극의 시대를 살아간 많은 젊은이들의 대변자이기도 하다. 특히 작품 속 PX 초상화부에 잠시 머물렀던 환쟁이 옥희도 씨는 지금은 고인이 된 화가 박수근을 모델로 하고 있다.

     

소설의 첫 도입부가 예사롭지 않다.  G I (미군)의 갈색털이 무성한 손이 내미는 사진 속 여자를 실크 스카프나 손수건 등에 그려주는 일을 하는 환쟁이들이며, 그들이 속한 PX 내 초상화부, 미군을 상대하는 이그조틱한 이름을 지닌 여자들이며 그외 이질적인 문화 등의 묘사를 통해 시대의 특수하고 기형적인 상황을 드러내며, 서글프고 불행한 비주체적 역사의 현장들을 다시 리플레이하고 있다.

서울 수복 후 미군들이 활보하는 서울 중심가  충무로 PX 초상화부에서 근무하는 주인공 이경은 미군을 상대로 짧은 영어를 구사하며 어떻게든 일거리를 많이 얻으려고 한다. 그래야만 가난한 환쟁이들이 최소한 먹고 살 수 있는 돈을 벌 수 있다. 그녀의 어깨가 무거운 이유이다.

     

6·25 전쟁으로 황폐화된 서울의 모습은 주인공 이경이 퇴근하며 돌아가는 풍경 속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충무로에서 중앙우체국을 지나 을지로, 화신 백화점 앞을  지나 계동에 있는 집까지 늘 걸어가는 그녀에게 두터운 어둠 속 불빛 하나 없이 방치된 폐허의 건물들은 괴물처럼 무서운 존재이다. 그래서 이경은 일과를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 집까지 동행할 누군가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종업원들의 유대감이란 몸수색당할 때 공동의 피해자란 잠시의 동질감일 뿐, 마치 풍선의 좁은 주둥이와 같은 출입문만 벗어나면 풍선 속 압축된 공기가 터져버리듯 제각각 인사도 없이 뿔뿔이 흩어져버린다.

     

전쟁이 끝나지 않은 현실에서 어디를 가나 안전하고 평화로운 곳은 없다. 이경이 두려움에 숨 가쁘게 내달려 집이 보이는 곳에 다다르면 별이 박힌 부연 하늘을 이고 선 한쪽 지붕이 일그러진 집이 보인다. 고가(古家), 이경에게 숙명과도 같아 떨치지도 머물지도 못하는 애증이 켜켜이 쌓여있는 곳, 오빠들에 대한 아름답고 행복했던 추억이 깃들어 있지만, 자신의 실수로 죽은 오빠들에 대한 죄책감과 회한으로 가득한 곳이다.

     

이경과 노모의 관계는 마치 좁혀지지 않는 평행선 같다. 벽처럼 가로막힌 감정의 공감부재, 일방향의 대화, 무감각과 무기력, 체념과 자포자기처럼 거무칙칙한 빛을 띠고 있다. 과거에 집착하며 현실을 부정하는 노모의 회색빛 고집 앞에 이경은 좌절하기 일쑤이다. 자신의 희망과 미래에 대한 꿈은 노모 앞에선 절대 비춰서는 안 될, 죽은 오빠들에 대한 도리가 아닌 것처럼 자신을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이경의 어두운 그늘과 아픈 상처의 근원은 무엇인가?  물론 전쟁으로 인해 피폐된 삶이다. 전쟁이 아니었으면 사랑하는 가족을 잃지도, 그 슬픔으로 괴로워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정다감하던 어머니의 모습도 죽은 송장처럼 변하지 않았을 테고, 이경 또한 젊음을 마음껏 누리며 자신의 꿈을 이뤄나갈 수 있었을 터이다. 이경뿐이겠는가, 당시를 살았던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경은 옥희도에게 남다른 마음을 갖고 있다. 그는 자신만의 세계를 지니고 있는 진짜 예술가이며, 그녀가 일하는 곳의 환쟁이들과 다르다고 생각한다. 이경은 옥희도의 눈 속 황량한 풍경의 일각을 발견하고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낀다. 그와 함께 할수록 그를 향한 존경과 애정은 깊어가지만 그는 이미 처자식이 있는 몸이다. 옥희도가 한동안 가게에 나오지 않자 이경은 그를 찾아간다. 옥희도는 집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는 가정 형편상 어쩔 수 없이 잠시 PX에서 초상화를 그렸지만, 그의 예술에 대한 열정은 강했다. 자신만의 그림을 그릴 수 없자 그는 병이 났던 것이다.

     

이경과 옥희도와의 사랑은 이뤄질 수 없는 신기루 같은 것이었다. 전쟁으로 열악하고 궁핍한 현실에서 그의 예술혼은 시들어가고 있었다. 그때 신선한 예술적 영감을 준 것이 이경이었고, 이경 또한 아버지와 오빠들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이 그에 대한 환상으로 이어지지 않았나 생각한다. 동경과 환상은 곧 깨지기 마련이다. 이룰 수 없기에 더욱 강렬하고 간절하겠지만 그런 감정이 무모하진 않을 것이다. 현실을 직시하면서 비로소 성장할 테니.

     

이경이 옥희도의 집으로 병문 간 날 그가 그린 그림을 얼핏 본다. 그리고 잎이 하나도 달려 있지 않은 큰 나무를 枯木이라 생각하고 경악한다. 실망스런 마음과 미움의 감정이 뒤범벅된 채로 돌아온 그녀는 자신을 좋아하는 전기공 황태수에게 마음을 열고, 결국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자신의 옆을 지키고 힘이 돼 준 태수와 결혼을 한다. 그리고 어머니의 분신 같았던 고가를 허물고 새집을 지음으로써 과거의 상처와 결별할 의지를 보이며 새로운 희망을 찾아간다. 아픔을 딛고 더 성숙한 모습으로.

전쟁이 끝나고 십년이 흐른 뒤 이경은 옥희도의 유작전에 가게 된다. 그곳에서 그의 그림 「나무와 여인」을 본다. 그리고 자신이 예전에 보고 고목으로 알았던 그림이 나목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럼 이경은  같은 나무를 보고 다르게 느꼈을까? 그것은 아마도 심리적인 영향 때문이라 추측한다. 죽은 나무라 생각했던 시절, 이경의 마음은 몹시 불안정하고 우울했다. 이경이 오빠들을 숨겼던 행랑채가 폭격에 파괴됐을  때 이미 그녀의 가슴 속에도 폭탄이 떨어진 거나 다름없었다. 그 충격으로 어머니는 영혼이 빠져나간 듯 행동하고 그녀는 그런 어머니를 볼 때마다 자신을 원망하고 미워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심리적 상황에서 무언들 희망적으로 보였을까!  

옥희도의 집에서 문제의 그림을 본 후 이경에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어머니도 돌아가시고, 전쟁도 끝났으며,  결혼 생활로 어느 정도 안정감을 얻었을 것이다. 또 아이도 갖게 되고 삶을  담담히 돌아볼 수 있는 시간적 여유도 생겼으리라. 믿고 싶진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 많은 것들이 정말로 감쪽 같이 사라지거나 흐려진다. 전쟁의 상흔도 마음의 상처도, 그러니 이경이 그림을 다시 보게 되었을 때 그것이 枯木이 아님을 느끼게 된 것은 인지상정인 듯싶다.

     

     

「나목」을 읽고 박수근 화백의 명화(나무와 여인)를 다시 감상해 보았다. 소설 속에서 작가는 옥희도를 선한 눈매를 지닌 순박하고 진실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실제 박수근 화가도 그렇다고 믿고 있다. 그의 그림을 보면 그의 성숙한 내면을 느낄 수 있다. 가장 한국적이고 서민적인 풍경을 많이 그린 그의 화폭 속 인물들은 대단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보통 우리들의 모습이다. 서민의 삶에 공감하고 소박한 행복의 가치를 소중히 여겼던 그의 마음이 느껴진다. 앙상한 가지가 무수히 뻗어나간 古木 아래서 아이를 업은 여인과 함지를 머리에 이은 두 여인의 모습이 왠지 애틋하다. 나무의 모습 때문에 겨울의 춥고 황량함을 상상하게 된다. 하지만 여인들보면서 모질고 험난한  시대를 나목처럼 끈질긴 생명력으로 묵묵히 견뎌낸  우리 어머니들의 모습이 떠올라 가슴 한편이 뭉클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김경욱의 《위험한 독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