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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 경 Oct 19. 2018

자전거를 타며


오랜만에 자전거를 탔다. 늘 그랬던 것처럼 처음 장비를 갖추고 스타트할 때는 새로운 세계를 항해하는 탐험가의 마음처럼 설렘과 기대로 가득찬다. 자전거의 페달을 힘껏 밟고 달리면 그  짜릿한 속도감에 경직됐던 몸과 마음이 풀리며  마치 어깻죽지에서  날개가 솟아나 새처럼 자유롭게 비상하는 듯한 착각이 든다.

눈앞에 펼쳐진 길은 무척 아름답고 낭만적이다. 청명한 가을하늘 아래 살랑대며 손 흔들어주는 억새풀과 수줍은 듯 다소곳이 고개 숙인  꽃들과 이름 모를 풀들, 머리를 풀어헤치고 곁눈질하는 무심한 듯 유심한 버드나무를 지나 은빛 출렁이는 강가를 지날 땐 얼마나 황홀하고 행복했는지를 회상하며, 같은 코스지만 늘 새로웠던 길을 달린다.  마침 바람까지 등 뒤에서 불어 순항의 예감에 젖은 선장처럼 느긋하고 여유 있게.

     

매번 느끼지만 자전거를 타며 감상하는 풍경은 차창 너머로 보는 풍경과는 전혀 다르다. 같은 자연이라도 개인의 마음 상태에 따라 다르게 보이지만, 보통 나와 풍경 사이의 거리만큼 생생함과 친밀함이 비례한다고 보면, 빠르게 지나가는 차창 밖 풍경은 연속되는 슬라이드 속 세상처럼 나와는 무관하게 또는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마치 하루에도 수십 명씩 스쳐가지만 눈길조차 주고받지 않는 타인처럼. 하지만 자전거를 타거나, 걷는 길은 무척 가깝고 친근하게 느껴진다. 잠시 멈춰 서서 주변의 자연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도, 만질 수도 있어 생명의 역동성을 느낄 수 있다.  가는 길마다 늘어선 풍경들의 수수한 모습 속엔 저마다의 개성이 존재하고, 제각각 표현하는 다양하고 풍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까만 포도에 노란 구렁이처럼 구불구불  이어진 선을 따라 가다보니 저만치 공항철도가 보인다. 그 위로 이국을 향해 출발하려는 이들의  많은 사연과 또 다른 기대와 설렘을 싣고 한결같은 리듬으로 전철이 달려간다. 여러 개의 다리 밑을 지나는 동안 마음에 드는 풍경을 만나면, 연인을 두고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는 사람처럼 애틋한 마음이 돼 자연히 다리에 힘이 빠진다. 지나치는 것이기에, 오래 머물 수 없기에 더욱 먹먹하며 그리울 것임을 아는 것처럼.

자주 현실은 부질 없는 꿈에서 깨어나라 한다.  저만치 앞서 가며 자꾸 뒤돌아보는, 어서 오라 손짓하는 그는 뒤쳐지는 사람을 기다릴 줄 모른다. 현실의 그로 인해, 부지런히 쫒아가야 만날 수 있는 그로 인해 또 속력을 낸다.

     

늘 그렇다. 조금만 자세히 보고 관심을 가지면 아름답고 의미 있는 것들이 세상 천지에 가득한데, 쉬는 법이 없는 시간의 꽁무니를 따라  앞만 보고 달리다 보면 어느 순간 깨닫게 된다. 중요한 것을 다 지나쳐갔음을. 두고 가는 것들이 그처럼 가치 있고 소중한 것이었음을.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알면서도 달리는 것을 멈추지 못하는 것이 인생인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현실을 핑계 삼아 늘 달리고 있는지도,  습관처럼 달리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돌아오는 길은 바람이 정면에서 불어 가는 길을 막았다. 있는  힘을 다해 밟아도 거리는 줄어들지 않고, 바람소리만이 귓가를 흔들었다. 저마다 표현된 주변의 작은 소리들을 모두 흡수해 하나의 커다란 세계를 만들어버린 바람의 위력을 새삼 느끼며, 아무리 저항해도 소용 없는 힘 앞에선 그저 조용히 순응하며 힘의 부가 돼 그것을 진심으로 이해하자는 체념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왔다.

그러자 바람소리 안에 제각각의 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새소리는 물론, 바람이 흔들 때마다 반응하는 온갖 생명의 소리, 포도 위를 힘차게 달리는 자전거 바퀴의 거친 숨소리, 억새풀과 나뭇잎의 움직임 소리, 사람들의 웃음소리, 다른 자전거에서 들려오는 흥겨운 노랫소리, 이모든 소리를 품은 바람소리는 원초적 생명의 소리였다. 자전거를 타며 문득 깨닫는다. 큰 우주의 티끌이자, 작은 우주의 주인인 내가 이곳에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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