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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 경 Jul 28. 2019

잠시 마주한 운명

 사거리 횡단보도에 파란불이 들어오자 정지됐었던 화면이 풀린 듯 사람들은 재빠르게 움직였다.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그들을 보며 마치 투명인간이 된 듯했다. 내가 이곳에 있다는 걸 눈치채는 사람이 있을까? 차도 건물도 바람도 일시에 멈췄다. 무거운 정적 위로 투명한 그림자처럼 사람들만 움직인다. 그때 그것이 느껴졌다. 차고 메마른 도시 한복판에서 숨을 헐떡이면서 콘크리트 바닥 깊숙이 흙을 향해 요동치는 생명이, 바람 없이 흔들리는 지친 울음이, 붙박아 놓은 운명이.


 운명이란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건 상관없다. 생명으로 태어나는 순간 선택할 수 없는 것들이 엄연히 존재하니까. 그건 분명히 정해진 것이다. 필연일 수도 우연일 수도 있지만, 분명한 건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것, 그런 불가항력적인 힘을 무어라 설명할 수 있을까. 아니 그건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다만 혼란스러움을 조금이라도 해소하기 위해 운명이란 그릇이 필요할 뿐.


 운명, 가끔은 비겁한 변명이나 자기 합리화로 악용되어 피하고 싶은 말이다. 하지만 오기와 저항열정을 불러오는 말이기도 하다. 피할 수 없는 유한성과 채울 수 없는 부재와 결핍은 역설적으로 허락된 삶 속에서 운명 극복의 또 다른 의미를 심어준다. 육체의 유한함에 갇히지 않는 정신의 무한함을, 주체적이며 자유로운 인간 본연의 가치를 깨닫게 한다.


 그날 사거리 횡단보도 옆에서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는 큰 가로수의 운명이 가슴을 짓눌렀다.  머릿속에 난무하는 수많은 언어가 지워지고, 풍경도, 사람도, 길도 모든 사물이 육체를 투과해 사라져 버리는 듯했다. 짧으면서도 긴 시간이 지나갔다.  길을 건너지 못했다. 정신을 가다듬고 나무를 보았다. 상처투성이 몸에 친친 감긴 헝겊이 반쯤 풀려 있었고, 목발  같은 것에 무거운 몸을 지탱있었다.


 외롭고 슬픈 마음, 누구의 마음이건 중요하지 않았다. 동질감을 느낀다는 것이 위로가 되었다. 무언가를 가슴이 먼저 알아보고 움직인다는 것, 언어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심오한 감정의 폭풍 속에 갇힌 그날, 슬픈 존재와 하나가 된 느낌이었다. 같은 운명을 알아본 것은 어쩜 당연한 일일 것이다. 산이 아닌 차가운 보도블록 위에서 그가 할 수 있는 허락된 자유란 오가는 존재를 바라보는 것뿐, 어쩜 자신을 더듬는 따스한 눈길을 기다리며 바람에 의지해 커다란 손을 흔드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간혹 자신과 같은 운명을 직감하고 잠시 하나가 돼 주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운명이란 이름의  단단한 고리로 이어진 생명  모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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