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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 경 Sep 21. 2019

가을, 그리고 이별

                   


 가을은 우울하고 몽롱한 활자가 난무하는 낡은 일기장 겉표지에서 시작됐다. 텅 빈 들판을 가로지른 축축하고 서늘한 바람이 메마르고 퇴색한 나무를 흔들고 있었다. 바람 속을 유영하다 살포시 내려앉은 낙엽들처럼 그리움도 차곡차곡 쌓여갔다. 가을이 그려놓은 파스텔 톤 풍경 위로 어스름 황혼이 사위어간다. 뒤이어 꿈처럼 아련한 기억들이 초저녁별처럼 희미하게 나타났다 옅은 구름 속으로 사라진다.

 

오래된 일기장을 보니 새삼 이별의 아픔을 그린 단편 영화 한 편을 보고 난 느낌처럼 먹먹하다. 빽빽이 적힌 언어들이 가을이 올 때마다 숱하게 앓던 아픔의 흔적들에 기억을 덧칠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가을 하면 떠오르는 상념이 이별인 것은 오래전에 배어 버린 나의 우울한 습관인지도 모른다.


 삶의 강렬한 의지들이 또렷이 박혔던 여름을 뒤로하고 결실의 유무와 상관없이 모든 생명은 휴지기를 맞고 있다. 가을은 힘을 빼고 나른하게 혹은 게으르게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허용된 가장 관대한 계절이다. 그래서 가을의 마음으로, 여유를 가장한 채, 회자정리란 말을 상기하며, 헤어지는 연습을 하곤 했다.


  훌훌 떠나는 이파리를 보면서 사랑하는 이들을 생각한다. 나무의 마음이 어떨까. 황폐한 땅 속에서 핏줄이 불끈 서는 아픔으로 끌어올린 생명수로 키운 잎들을 떨쳐내야 하는 나무의 마음, 새들이 나무의 어깨 위에 앉아 영원한 이별이 아니라고 조잘대며 위로하지만 이별의 슬픔은 쉽게 가시지 않는다.

 여름의 끝에 왔다 가을에 떠난 친구를 생각했다. 내가 슬퍼할까 봐 외로울까 봐 새처럼 조잘대며 애써 명랑한 척 밝은 척했지만, 친구의 웃음 뒤에 감춰진 눈물을 눈치 채지 않으려고 내가 먼저 돌아섰다. 하늘을 보았다. 잿빛 구름이 서글프게 아름다웠다. 공항으로 가는 리무진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이별이 이런 거라고 놀리듯 스산한 바람은 나뭇잎을 자꾸 떨구었다. 뜨거운 것이 코를 통해 목구멍으로 넘어와 소리 내지 않게 삼켰다. 공항까지 가겠다던 나에게 친구는 정말 관대하게 말했다. ‘배웅 안 해도 정말 섭섭하지 않아.’  


 대개 최초의 경험은 잊히지 않나 보다. 그 후로 친구는 몇 번 같은 계절에 왔다 갔지만 그때만큼 찌릿한 아픔으로 남았던 가을은 없었다. 그날 친구와의 이별 풍경이 마음속 그림처럼 남아 있는 건 아마도 가을과 이별이 하나였음을 온몸으로 느꼈기 때문일 게다. 바람에 뒹구는 낙엽을 보는 것처럼 슬프고 쓸쓸한 풍경은 없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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