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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 경 Mar 04. 2020

길 위에서

 어디선가 새어 나온 안개가 작고 하얀 화면을 덮어버린다. 불쑥 튀어나온 오래되고 생경한 낱자들은 회색 빛 속에 갇혀 길을 읽고 헤매다 사라진다. 물리적 세계를 덮어버린 거대한 공포와 불안이란 안개는 마음속 길을 숨기기도 사라지게도 만든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늪마저 품고 있다. 한 때 무한한 우주를 떠도는 마음으로 설렘과 그리움, 기분 좋은 두려움의 낱자들을 마음껏 풀어놓았던 작지만 큰 공간 속 세계를 오랫동안 뚫어지게 바라본다. 그것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자주’와 ‘오랜만’이란 상반된 두 단어의 심적 괴리감이 좁혀진 느낌이다. 자주 가던 곳도, 자주 만나던 친구와 동료도, 이런저런 모임도 오랜만이란 단어로 대체된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들은 어느새 일상을 지배하게 된다. 처음 당혹과 경악은 분노와 원망으로 바뀌고, 시간이 갈수록 의혹과 불신의 눈빛, 코와 입을 가린 하얗고 검은 마스크는 소통과 공감을 절대 허락하지 않겠다는 의지처럼 견고하게 붙어있다.


 육체의 병보다 마음의 병이 더 무섭다는 것을 안다. 마음이란 제멋대로 뻗어나간 무성한 가지와 우울한 안개가 품은 늪처럼 은밀하고 잘 보이지 않기에 그냥 지나치기 쉽다. 빠지고 나서야 그것이 얼마나 벗어나기 힘든 것인지 느끼게 된다. 그럼에도 당장 눈앞에 보이는 육체의 병에 함몰돼 그것을 간과하게 된다. 육체적인 격리가 마음의 상처로 이어져 서로가 마음으로 격리되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오랜만에 쓰는 글이 우울한 언어들로 채워져 마음이 편치 않다. 하지만 갈피를 잡지 못하는 마음이 온 세계를 점령해버린 바이러스 탓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바이러스는 언제 어디서나 인간과 함께 공존해 왔으며 또 박멸되고 다시 생겨난다. 곧잘 세상에 중심이 인간이 아니란 사실을 무언의 시위로 각인시켜 주듯이 말이다. 삶이 반복되는 한 역경과 고난도 무한히 지속된다. 그럴 때마다 육체와 마음은 고통으로 신음하지만 이 또한 지나갈 것임을 알기에 다시 일어선다. 여전히 나는 길 위에 서 있고, 이미 오래전에 많은 사람들이 거친 숲과 늪지대와 광활한 사막을 지나갔듯이 또 그런 길을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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