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지개 경 May 26. 2020

비와 산 그리고

 안개비는 차갑고 단호한 포장길에 부딪혀 스러진다. 그것은 육중한 몸으로 우뚝 선 산이 내뿜는 섬세하고 서늘한 입김처럼, 숨 쉬는 모든 생명의 구멍에서 뿜어져 나오는 미지근한 열기와 서늘한 바람을 품고 있었다. 묘한 긴장감과 설렘으로 가슴이 지근거렸다. 이성과 논리가 고요하고 침착한 어조로 휘몰아치는 마음을 자근대기 전에 지체 없이 움직였다. 그렇지 않음 충동이란 이름으로 억압된 감정의 아우성을 외면해야 할지 모른다. 의도와 위선으로 인해 소외된 마음을 모른 채 해야 한다. 머리보다 마음이 강했던 시간이, 무모한 일을 하면서 행복했던 시절이 그리워졌다.


 콘크리트길이 끝나자 산의 초입으로 들어가는 철조망이 나타났다. 그것은 문명과 자연을 구분 짓는 배타적 선처럼, 이방인을 향한 문지기의 의심 어린 눈초리처럼 얼기설기 늘어서 있었다. 아무렇게나 엉켜버린 야생의 관목 일부가 바깥세상이 궁금한 듯 철조망 사이로 고개를 삐죽 내밀고 있었다. 시큰한 쇠의 감촉을 느끼며 작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물기 품은 거대한 생명체 속으로 들어서자, 한기가 느껴졌다. 그제야 웃옷을 가져오지 않았단 걸 알았다. 뭐가 그리 바빴을까.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산은 자욱한 안개로 쓸쓸하고 적막했다.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에 가녀린 이파리가 몸을 비비는 소리, 무언가 허공을 향해 날아가는 소리, 발을 옮길 때마다 따라오는 작은 돌 구르는 소리, 무엇 하나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소리가 없었다. 고요해서 더 잘 들리고, 보이고, 느끼는 것들은 언제나 벅찬 감동을 준다. 조용히 나를 돌아보는 곳, 비 오는 날 산을 찾는 이유이다.


 아니, 성찰과 반성뿐만 아니다. 모질고 거친 마음을 토해내기에 이곳처럼 만만한 곳이 없기 때문이다. 비가 쏟아지던 날 무작정 우비를 입고 산을 올랐다. 가슴에 물이 함빡 차서 온 구멍으로 토해내도 끝없이 쏟아지던 날, 무너지는 마음을 보이지 않으려고, 그것이 눈물이란 걸 인정하기 싫어서 산을 올랐다. 누구도 날 보지도 찾지도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정신없이 산을 오르다 돌에 걸려 넘어지고 다시 오르며 거친 숨소리가 그처럼 크게 들린 적이 없었다. 숨을 몰아쉴 때마다 산도 같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비도 나를 위해 울어주는 것 같았다. 정말 그곳은 내 마음이었다. 나 아닌 다른 것과 하나가 된 느낌, 처음 겪는 신비한 느낌이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젊음의 광기였던 것 같다. 그만한 상처와 아픔은 누구나 겪는 것이지만, 아픔을 치유하는 방식은 다르기에 그것 또한 나에겐 깨달음의 시간이었다.


 지금도 비가 오는 날이면 무작정 산에 가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하지만 이것저것 생각하다 보면  귀찮은 마음이 앞선다. 가끔, 안개비가  내리는 날 정도는  아무 생각 없이 나서려 한다.  이제 감정보다 이성이 제어하는 날들이 많아졌기에. 인생의 연륜도 쌓이고 어른으로서 책임감 있게 살아야 한다는 어떤 당위성 때문에 많은 걸 참는다. 하지만 무뎌져 가는 자신이 유난히 싫은 날은 충동적이고 과격했지만, 감정에 충실했던 그런 날들이 그리워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매거진의 이전글 길 위에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