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반이 지나간다. 꼭 꺼내보고 싶은 낡은 수첩이 있다. 하지만 만지작거리기만 할 뿐, 용기가 나지 않는다. 냉정해지려 해도 감정이 복받쳐 폭발해 버릴 걸, 회한의 강이 깊어질 걸 알기에, 본능은 자꾸 덮어두라 회피하라 한다. 매년 이만 때만 되면 도지는 병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그것이 계절의 특권인가 보다. 기억하지 않으려 해도 그들만의 무기로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지배해버리고 만다. 8월의 폭우와 습한 바람도 그렇다. 그것들은 우울의 메타포가 돼 텅 빈 마음을 노린다. 자신들이 점령했던 그 시간들을 토해놓으라 아우성친다.
낡은 수첩엔 숫자들이 빼곡하다. 그것을 보면 느낄 수 있다. 험난한 세상에서 그녀가 얼마나 치열한 삶을 살았는지, 다정하고 친근한 이름들에게 그녀가 줄 수 있는 최선이 무엇인지 고민한 흔적들을, 방백처럼 자신의 마음을 오롯이 표현한 문구들 속에 그녀의 외로움, 삶의 무게가 얼마나 컸을지를.
8월이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달과 날자에 집착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건조하고 형식적인 의식들 때문인지 모른다. 일 년에 한 번 그렇게 기억하고 또 새기면서, 시간이 조제해준 망각의 약으로 점점 희미해져 가는 기억을 움켜잡고 싶어 한다, 그래서 8월이 더 아프고 슬프다.
삶은 크고 작은 상처의 기억들로 이뤄졌다. 잘 아문 상처는 시간의 덧칠 속에 희미해지지만 때때로 꾸둑꾸둑해질수록 가렵고 아파, 피가 나고 곪을 줄 알면서도 다시 긁게 되는, 비록 시간의 명약으로 새살이 돋아 치유한 듯 보여도 꾸물거리는 날씨에 지근대는 통증처럼 결코 아물지 않는 상처가 있다. 아니, 아물지 말아야 하는 상처.
어떤 상처는 삶의 원동력이 된다. 상처가 욱신거릴 때마다 나를 직시하고 성찰하게 만든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을 생각한다. 아픔 이면에 기쁨이, 불행 이전에 행복이, 누구보다 사랑했던 사람들이 있었던 사실을. 타인에 대한 사랑이 미래에 얼마나 큰 빛을 발할 수 있는지, 그 기억으로 누군가는 살아갈 희망과 용기를 얻는다는 것을, 진정으로 상처는 성숙해지기 위해, 행복해지지 위해 겪어야 하는 축복임을.
비록 바이러스가 우리의 일상을 위협하고, 마스크를 하지 않음 외출을 하지 못하는 이전에는 결코 경험해 보지 못한 힘든 시대를 살고 있지만, 8월, 공포를 조장하듯 검은 구름이 하늘을 메우고 분노하듯 퍼붓는 폭우가 더욱 현재를 암울하고 슬프게 만들지만, 그럼에도 내가 웃을 수 있는 건 낡은 수첩 속 당신의 마음 때문이란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