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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 경 Nov 30. 2020

소리의 정체

  천장에 큰 시계가 붙어있는 것 같았다. 시계는 시도 때도 없이 알람을 울려댔다. 알람은 비명도 되고 폭포수도 되고 부서지고 무너지는 파괴의 소리도 되었다. 전혀 원하지 않는 알람이 강제로 장착되고부터 민경은 내부에서 뜨거운 열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폭발해버릴 것 같은 뜨거운 분노였다.

 처음엔 흐느낌 같은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오더니 점점 소리가 잦아지면서 날카로운 비명 같은 것으로 변했다.  잘못 들었거니 하면서 소리의 정체를 추측해보려 어둠 속에서 귀를 기울였다. 어떤 날은 몇 번의 경미한 울림이 규칙적으로 전해 오더니 갑자기 무거운 도구로 무엇을 두드리는 둔탁한 소리가 돼 공포심을 자극했다.


 

 위층에서 들려오는 이상야릇한 소리는 서서히 민경의 잠을 갉아먹고 심장을 두드리며 머리를 강타했다. 민경은  당장 위층으로 뛰어 올라가 소음의 정체를 확인하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다. 소음은 대체로 12시가 넘으면 시작되었고 새벽이  돼서야 조용해졌다. 아니 확실히 른다고 민경은 생각했다. 병적이라 할 만큼 예민해진  자신의 정신이 어렴풋이 본 시간이 대충 그러했으리라 짐작할 뿐이었다.

 그동안  민경은 자신이 살고 있는 아파트에 불만이 없었다. 20년이 넘은 아파트이고 마을버스를 타야 하는 외진 곳이지만, 몇 번의 이사 끝에 정착한 보금자리였다. 오래된 아파트치곤 꽤 튼튼하고 깨끗한 편이었다. 무엇보다 아파트 뒤로 버티고 선 묵직한 산이 믿음직스러웠다. 게다가  주민을 위한 시설이 잘 갖춰져 운동과 산보하기에 좋았다. 역세권이니 뭐니 하면서 편리한 교통을 내세워 값만 비싼 아파트보다 훨씬 실속 있고 살기 좋다고 민경은 자부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파트 숲을 지날 때마다 정체모를 결핍과  메마름을  느꼈다.  허공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언제나 차고 건조했다.



 500세대가 사는 작은 서민 아파트라 그런지 이삿짐 차들은 늘 들락날락했다. 오가다 얼굴을 익힌 사람들이 하나 둘 보이지 않으면 새로운 얼굴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그녀가 사는 동은 다른 동으로부터 좀 떨어져 특별히 설계되었다는 느낌을 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평수가 다른 동의 2배였다. 사실 민경의 가족이 처음 입주한 곳은 동일한 아파트 작은 평수였다. 그런데 식구가 많아지자 좀 더 큰 평수의 아파트가 필요했고, 다른 곳으로 가자니 아파트 값이 너무 비쌌다.


 민경이 이곳 아파트에 들어와 산지도 적잖은 시간이 흘렀는데, 지금 사는 집이 급한 매물로 나오기 전까지는 남동쪽 방향으로 홀로 서 있던 15층짜리 아파트 한 동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민경은 이곳 아파트의 평수가 다 똑같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운이 좋았는지 민경의 가족은 살고 있던 작은 평수의 아파트를 처분하고 그녀 남편의 퇴직금을 합해 경매에 넘어갈 처지에 있던 집을 평수에 비해 무척 싼 가격에 구입하게 되었다.

 민경이 사는 동은 9호 라인이다. 한 층에 한 집만 있어서 용무가 있지 않는 한, 가족이나 지인, 가끔 배달원 이외에 낯선 타인이 문 앞에 얼쩡거릴 일은 없었다. 아래층은 노부부와 그의 두 아들이 함께 살고 있는데, 민경이 그 집의 가족 구성원을 알게 된 것도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위아래층 간의 누수 문제 때문이었다. 그녀의 집 보일러가 잘 못 돼 물이 샜고, 아랫집 천장에 물이 고여 떨어지면서 그 문제를 해결하느라 여러 번 왕래하면서 얼굴을 익히게 되었고, 그 후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면 눈인사 정도는 하게 되었다.


 얼마 전 위층 주인이 바뀌었다. 그전에는 중년 여자와 아들 내외가 함께 살았다.  그녀는 남편이 없었다. 사별인지 결별인지 속사정은 모르지만 홀로인 것만은 확실했다. 가끔 민경은 위층 여자와 엘리베이터를 같이 탈 때가 있었다. 처음은 어색한 분위기에 인사를 했지만, 몇 번의 마주침에서 그녀가 빵집을 한다는 사실까지 알 정도로 안면을 트게 되었다. 그런데 얼마 전에 급하게 집을 내놓고 이사를 갔다. 인사도 없이,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민경은 이웃사촌이란 말이 사전에서 사라져도 특별히 이상할 게 없단 생각을 하며 피죽 웃었다. 이웃이 무서운 공포의 대상만 되지 않아도 다행이라 생각하면서.

 

 민경은 새로 이사 온 위층 사람들을  이제껏 보지 못했다.  이사도 늦은 가을 오후쯤  했고, 짐도 단출한 것 같았다. 별로 관심이 없었던 탓에 그날의 장면을 유심히 보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와서 위층에 대한 온갖 생각에 골몰하고, 정체모를 소리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괴로워할지 꿈엔들 몰랐다.

 늦은 밤, 잠을 놓쳐버린 민경은 열에 들떠 생각했다. 어둠의 침묵 속에 들리는 소리는 그 어떤 소리보다 크고 뚜렷하게 귀에 박힌다. 그런데 사람들은  관대할 수 있을까, 아니다 분명 불만이 접수됐을 텐데,   관리실에서는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는 걸까,  분명 내일이면 무슨 결단이 날 것이라 믿으며 민경은 진정하려 애를 썼다.  그런데  다음날  밤에도 소리는 라지지 않았다. 민경은 예의도 모르는  비상식적인 사람들에게 화가 났다. 생면부지의 타인이 왜 자신에게 피해를 입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갈취당하는 것 같았다. 민경은 이곳으로 이사 와서 그녀만의 공간을 만들기 위해 거실 한 편에 작은 서재를 만들고, 늘 그랬듯이 하루를 마감하는 일기를 쓰면서 조용한 밤을 맞았다. 언제나 푸근하고 정겨운 밤 풍경을 바라보며, 깊은 상념에 잠기기도, 잔잔한 음악을 들으며 지친 마음을 달래기도  했다. 험악한 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민경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내일 날이 밝으면 꼭 올라가 단판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경비실에 전화해서 대신 알아봐 달라고 하든지, 아무튼 더는 견딜 수가 없었다. 민경은  다음 날 잠시의 망설임을 뒤로하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굳게 닫힌 문을 보는 순간 층간소음 문제로 칼부림이 났던 사건이 떠올랐다. 그녀는 문이 열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 소리들로 미루어 보았을 때 폭력적이며 흉악한 사람들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민경이 머뭇거리고 있는데 문이 열렸다. 그녀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40대쯤으로 보이는 여자와 십 대의 남자아이가 외출하려는 것 같았다. 그쪽에서도 놀라며 무슨 일로 왔냐고 물었다. 동시에 남자아이가 소리를 질렀다. 민경은 침착하게 말했다. '밤에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 힘들다고.' 


 여자는 말했다. 미안하다고, 사실은 아이가 자폐증을 앓고 있다고, 밤에 난리를 피우고 잠을 자지 않아 수면제를 먹여 재운다고 했다. 병원에 있다가 집에서 간호하려 데리고 왔는데, 감당할 수 없어서 다시 병원으로 데려간다고, 무엇보다 이웃에 피해를 주는 것이 괴롭다며 쓴웃음을 짓는다.  


 민경은 멀미가 났다. 그녀의 난처한 표정과 아이의 커다란 눈을 보며,  민경은 알 수 없는 먹먹함을 느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이곳, 아파트 숲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생각에 허탈감밀려왔다.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들이 일제히 일어나 반란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그녀는  부끄러웠다.  안식처란 견고한 울타리를  만들어, 보고 싶은 것만 보았던  이기심,  소리의 정체를 마음대로 상상하고, 이웃을 공포의 대상으로 몰고 갔던 불신이, 순간 어떤 소리가  섬광처럼 다가와 민경의  심부를 흔들었다. 민경은  비로소 알게 되었다. 아파트 숲을  차고  메마르게 만드 소리의 정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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