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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 경 Dec 22. 2020

들어줬을 뿐인데


 매서운 추위를 피할 곳이 없었다. 녹색 불을 향해 걸음이 빨라졌다. 헐떡거리며 횡단보도 끝에 닿자 정지하고 있던 차들의 헤드라이트가 주변을 밝히며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몇 사람이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차례를 기다려 택시를 탔다. 택시 안은 따스했다. 온기에 몸이 녹자  몸이 흘러내리듯 좌석에 파묻혔다. 김이 서린 창문 밖 풍경이 아련했다. 창을 닦았다. 창밖의 불빛들은 제각각 흩어지고 있었다.


 택시에서 내려서 문자로 안내한 곳을 찾기 시작했다. 하차한 큰길에서 조금 내려가서 오른쪽 길로 조금 가다 보면 S편의점이 있을 거라고 했다. 그곳을 중심으로 사거리가 나오는데 왼쪽 길로 조금 가다 보면 양쪽으로 빌라들이 열 지어 나타나고, 계속 직진해서 조금만 가다 보면 빌라를 개조해 만든 가게가 나타나는데 그중 R카페가 있으니 잘 찾아오라고 덧붙였다. ‘조금’이란 말이 습관처럼 붙어 있어 거슬렸다. 도대체 조금이란 어느 정도를 말하는 건지, 장소를 아는 사람에겐 조금 일지 몰라도 초행자에겐 한참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카페는 큰길에서 동떨어져 있었다. 볼품없는 빌라 사이에 숨어있었다. 일부러 찾아오지 않으면 눈에 뜨일 일이 없을 것 같았다. 아는 사람이 아니면 찾기 힘들 거라 생각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겉과 달리 내부는 무척 우아하고 고풍스러웠다. 마치 거친 껍데기 속의 진주처럼 사람들의 눈을 피해 고독을 즐기고 있는 듯했다.


 카페 안은 사람이 없었다. 주인인 듯한 여자가 마스크를 쓰고 눈인사를 했다. 텅 빈 공간에 그녀는 홀로 꿈꾸듯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나를 보자 담금질을 기다리는 철판처럼 벌겋게 달아올랐다. 얼마 전 전화 속 그녀의 음성은 몹시 격앙돼 있었다. 말할 상대가 필요하면 서로를 찾았던 예전의 습관이 암묵적 합의처럼 이어져 왔기에 만남은 자연스러웠다.


 그녀는 추워 보이는 얇은 검정 모직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어깨쯤 내려오는 검은 머리카락을 단정히 뒤로 묶었는데, 몇 가닥의 머리칼앞으로 흐르는 걸 허용치 않겠다는 단호함처럼 여러 개의 핀이 머리에 박혀 있었다. 작은 얼굴을 거의 덮은 검은 마스크와 폴라 티, 보플 난 털조끼까지 온통 검은색이었다. 마치 검은 장막이 그녀를 뒤덮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동료 교사였던 그녀는 몇 년 전 독립해서 작은 학원을 차렸다. 그런데 코로나 사태가 벌어져 학원 운영이 어려워진 것이다. 임대료도 나오지 않아 힘들었지만 아이들을 지도하는 것을 천직으로 여겼던 그녀는 어떻게 해서라도 학원을 지키고 싶어 했다. 그런데 함께 일하는 선생님이 코로나 확진을 받았고, 학원은 임시 폐쇄되었다. 다행히 그녀는 음성으로 나왔지만, 정작 그녀가 참기 힘들었던 건 확진 자에 대한 편견과 기피로 인해 학원이 공포의 장소로 낙인찍혀버린 사실이었다.


 따뜻한 차를 마시면서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는 내면에 쌓인 답답하고 괴로운 말들을 천천히 토해냈다. 그녀는 용히 말하다 갑자기 흥분하고 때론  분노하다 울먹이며 헛헛하게 웃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녀의 감정담담하고 차분해졌다. 그리고 자신의 말을 들어주는 친구가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며 활짝 웃었다. 그녀의 환한 웃음이 그녀를 덮고 있던 검은 우울을 거둬갔다.


 그녀에게 조언이나 위로의 말은 필요치 않았다. 경청하면 그뿐이었다. 모든 것은 그녀 자신이 해결하고 극복했다. 말하면서 스스로 현실을 직시했고, 수긍했고, 상처를 치유했으며, 미래를 대비했다. 그리고 마음의 안정을 얻었다. 물론 모든 문제가 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안개가 걷히면 형체가 보이듯 혼란스러운 마음이 진정되면 길이 보일 것이다. 그녀가 삶의 의욕을 되찾는 작으나마 나의 힘이 보태졌다니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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