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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 경 Jan 05. 2021

눈의 기억

 

성에 낀 창문을 문질렀다. 맑은 눈이 익숙한 풍경 위로 자유롭게 비행한다. 반가운 마음에 창문을 열었다. 경쾌한 바람을 타고 차고 부드러운  얼굴로 달려든다.  눈의 감촉이 오랜 기억을 깨운다.


 땅에 부딪혀 물이 되고 얼음이 되기 전 황홀한 무예를 한바탕 벌이고 내려앉을 눈을 상상한다. 올해 마지막이 될 눈을. 하지만 눈은 싱겁게 내리다 끝나버린다. 몇 겹으로 쌓이지도, 매끄럽고 투명한 모습으로 변하지도 못하고 형체 없이 스러진다.


 지나간 눈의 기억을 되살린다. 눈이 반가운 손님이었던,  때 묻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없이 쏟아지는 눈이 좋아 마당 한 복판에서 두 팔을 벌려  몸으로 눈을 맞았다. 더럽게 쌓인 먼지를 씻어내듯 몸의  병균이 떨어져 나가길 바랐다. 사방에서 내리는 눈을 보고 있으면   세상에 홀로 남겨진 듯했다.


 눈이 그친 날도 마당에 나가 눈을 보았다. 공부도 눈을 보는 것처럼 지루하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쌓인 눈 사이로 희미하게 햇살이 비추면 눈은 차갑게 서로를 끌어안았다. 부드럽고 연약한 제각각 모습은 사라지고 강인한 덩어리만 남았.  아이는 눈이 되어 함께 뭉치고 싶었다. 차가운 결정체를 두 손으로 움켜잡았다. 몸을 점령한 뜨거운 불덩이를 식혀줄 것 같았다.


 길들여지지 않는 하얀 자유에 들뜬 조악한 열정이 아이의 몸을 얼어붙게 했다. 손안에 눈 뭉치가 물이 돼 흐를 때까지 화끈거리는 손을 꼭 쥐고, 눈이 아프도록 시린 허공을 쳐다보던 아이는 그날  밤새도록 끙끙 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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