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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 경 Dec 13. 2020

이별

슬퍼도 괜찮아

 

 마른 잎들은 아직 이별할 준비가 돼 있지  않은 지 간간이 부는 바람에 사각일 뿐 앙상한 가지에 위태로이 붙어 있다. 이별은 자연의 리와  무관하게 주저와 망설임이 내재돼 있. 정들고 익숙했던  존재와 풍경을 두고 낯선 곳으로 가야 한다면 어느 것인들 그렇지 않을까.


 유명 시인이 쓴 시처럼 가야 할 때가 언제인지 분명히 알고 떠난다면 뒷모습 조차 아름다울 있을 텐데 안타깝게도 이별의 아픔을  높은 차원로 승화시키는 성숙 이별이나  냉정한 이성으로 준비이별은 흔치 않다. 오히려 이별은 전혀 뜻밖에 찾아오거나, 눈치채지 못하게 살금 다가와 느닷없이 정체를 드러내기도 한다.


 조카 부부캐나다 이민을 통보했을 때 여동생은 한동안 멍하니 조카를 바라보았다. 전혀 예기치 못한 이별의 서막은 놀람 강한 부정이었다. 멈춰진 시간이 풀리고 정신을 차렸을 또 다른 형태의 감정이 동생을 엄습했다. 이별을 준비할 기회를 주지 않은 상대에 대한 서운함과 배신감이었다. 잠시 헤어짐이 아니기에, 먼 타국이기에 이별은 더 두렵고 힘들 것이었다.


 조카 부부는 갑자기 결정된 일이라고, 죄송하다고 울먹인다. 동생은 갑자기 찾아온 이별이 가슴 아프지만 이내 체념한다. 그리고 현실을 수용함으로써 마음의 안정을  꾀하려는 본능에 따른다. 동생은 금세 그들을 이해했다. 사랑하는 부모, 형제, 친구를 두고 가는,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차마 떨어지지 못하는 마른 잎새 같은 그들의 마음을.


 조카 부부와 동생 가족의 이별은 차라리 낭만적이다. 최근 뉴스에서 접한 이별의 모습은 실로 충격적이다. 바이러스죽어가는 가족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는 것은 물론 시신조차 가족 품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낯선 곳에 방치되 비상식적인 일들이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 있다. 하루아침에 생이별을 하는 사람들, 이별이라 부르기 경악스러울 만큼 참혹하다. 그건 마치  전쟁터에서 뿔뿔이 흩어진 가족이 생사를 모르고 헤매는 것처럼 처참하고 비극적이다. 가까이 갈 수도 만질 수도 지켜볼 수도 없는, 세상에서 가장 가슴 아픈 이별이다.


  

 때를 알고 떨어지는 낙화처럼, 사랑하는 이들을 뒤로하고 새로운 삶을 향해 떠나는 조카처럼, 잔인병마와 싸우다 이 세상과 이별할 수밖에 없었던 많은 사람들처럼, 이별은 다양한 깊이와 모습으로 다가와 사람들 마음에 상처의 흔적을 남긴다. 그럼에도 이별은 우리 삶을 관통하고 있는 필연적 과정이기에 체념과 인내, 때론 희생과 축복이란 말이 항상 붙어 다니는지 모르겠다.


 진심으로 이별을 원치 않지만, 만약 그런 일을 겪게 된다면 담담히 감내할 수 있을지 지금은 자신이 없다.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이미 큰 이별의 시련을 경험한 바 있지만 그때는 너무 어렸다. 갑작스레 닥쳐온 이별을 어찌할 바 몰라 그저 본능대로 행동했다. 온몸으로 버텨내다 쓰러지곤 했다. 다행히 그땐 슬픔을 이겨낼 버팀목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누군가의 버팀목이 돼야 할 위치에 있기에 더 인내하고 강해져야 함을, 용기 있게 이별과 대면해야 함을 직시한다. 그러기에 원치 않는 이별이지만, 늘 가까이 두려 한다. 무방비 상태에서 이별을 맞을 수는 없기 때문이. 크게 보면 회자정리란 말처럼 이별 또한 자연의 섭리일 뿐이다. 누구나 피해 갈 수 없는, 순응해야 할 필연이라면, 이별도 그런대로 괜찮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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