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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 경 Dec 06. 2020

어떤 체험

짧지만 강렬한

 

 차고 냉랭한 바람이 목덜미를 스친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옷을 더 껴입었는데도 냉기는 틈만 있으면 살갗을 침투해 겨울의 위엄을 과시하고 있다. 남은 수업을 위해 부지런히 움직인다. 일상 속에 운동을 실천하기 위해 차를 갖고 다니지 않은 지도 꽤 됐다. 대신 감수해야 하는 것들도 있다. 시간에 쫓긴다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하는 번거로움이나, 바이러스에 대한 불안감 같은 것이다. 그래도 10층까지 걸어 올라간다.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함이다.


 베란다에서  바라본 밖은 어둡고 깊었다. 막 수업을 끝내고 일어서려는 참이었다. 아이의 공허한 눈빛이  곳에 머물다 되돌아왔다. 언제부턴가 사람의 눈을 들여다보는 습관이 생겼다. 세태에 따른 궁여지책이랄까. 눈이 아무리 마음의 창이라 해도 상대의 눈을 뚫어지게 보는 건 나로서는 아직 어색하다.  올 겨울은 번득이는 눈들이 하얀 눈을 녹일지도 모르겠다. 전신을 친친 싸매거나 두르거나 덮는 데도 모자라 어쩔 수 없이 마스크까지 하게 되었으니 유일하게 허용된 눈빛은 더 또렷해지고 형형해질지 모를 일이다.


 일 년이란 시간은 아이에게 어떤 기억을 심어주었을까, 아이의 눈을 보며 생각했다. 언젠가 아이가 말했다. 올해 중학생이 됐는데. 아직 친구를 사귀지 못했다고, 같은 반 아이들 중  이름도 모르는 아이가 있는데 믿어지냐고 물었다. 소설 속에나 나옴직한 세상 같다고, 재난 영화 같다고도 했다


 근심 어린 눈빛과 자조 섞인 아이의 말투가 뇌리에 박혀  소화되지 않은 음식이 가슴에  듯 답답다. 버스를 기다린다. 늦은 밤, 찬 바람은 사람 없는 정거장을 허허롭고 을씨년스럽게 만들었다. 늘어난 배차간격으로 버스는 더 있어야 온다고 전광판은 말한다. 시간은 한 장 남은 달력처럼 호젓하 단조롭게 흘러간다.


 저녁을 먹지 못한 탓인지 허기와 한기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옷깃을 여밀수록 몸이 더욱 작아져 옷 속에 파묻힐 것 같다. 가로등 빛에 소외된 건물들은 우중충하고 음산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부드러운 빛의 선율로 사람들을 유혹하던 카페나 선술집, 예쁜 옷 가게였는데, 불 꺼진 내부는 지나가는 차의 불빛으로 희미하게나마 어떤 흔적을 보여주거나 통증처럼 거기에 웅크리고 있었다.  


 한참만에 버스가 왔다. 버스 안은 고요했다. 뒤를 돌아보니 자리가  비어 있었다.  늦은 시간이라 그런가 보다.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운전사는 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마스크 위로 빼꼼 나온 눈언저리가 그늘져 있었다.  불현듯 저승사자가 떠올랐다.  그런 상상에서 벗어나려 고개를 저었다. 언젠가 보았던 호러 영화가  생각났다. 주인공이 승객이 없는  차를 타면서 벌어지는 기괴하고 공포스러운 내용을 담고 있었다. 버스는 덜컹거리며 달리고 있었다.


 버스는 모든 정거장을 지나쳐 질주하고 있었다. 거의 땅 위로 붕 떠 날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기사분, 좀 천천히 가 주세요.'  입 밖으로 뱉었는지, 웅얼거렸는지 확실치 않다. 아무 반응이 없었다. 백미러로 웃고 있는 모습이 기괴해 보였다. 소름 돋았다. 소리를 질렀다. 아니 소리는 나오지 않고 목구멍 속에서 맴돌고 있었다. 시간의 흐름을 알 수 없었다. 찰나이면서 영원처럼  느껴졌다. 눈을 번쩍 떴다. 창 밖으로 낯익은 장소가 지나갔다. 얼른 하차 벨을 눌렀다. 동시에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모호한 공간을 체험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없다. 그것은 물리적 공간이라기보다 결국 어떤 기억이다.  열병에 시달렸던 어린 시절, 공포와 두려움에 위눌렸던 순간이 있었다. 그럴 때 돌아가신 할아버지나 할머니를 보았고,  이상한 옷차림을 한 사람들로부터 달아나려고 발버둥을 치다 땀에 흠뻑 젖어 깨어나기도 했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망자를 불러냈을지도 모른다.


 당연히 꿈이라 여기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 프로이트의 에 대한 해석을 차치하더라도 잠재된 무의식이 꿈으로 표출될 가능성은 다분히 다. 지난날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무언가에 대한 욕구가 억압되었거나, 정서적 불안에 직면했을 때 이런 현상이 나타나곤 했었다.  그러다 어른이 되면서 차츰 사라졌다. 


 생각해 보건대,  그날  버스가 평소와는 다른 움직임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정거장을 지나친 이유는 기다리는 승객이 없었거나, 시간에 맞춰 가야 하는 어떤 사정이 있었거나, 그 외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우연찮게 나는 승객이 하나도 없는 버스를 탔고,  갑자기 공포 영화가 생각났으며, 허기와 한기로 노곤해진 심신에 피로와 스트레스가 덮쳐 짧은 순간 깊은 잠에 빠진 것이다. 이틈에 새로운 변화를 갈망하는 자아가 권태와 타성에 젖은 자아를 깨우며 감각의 착오를 일으켰는지도 모르다.  어찌 됐든 그걸 밝히는 건 중요하지 않다. 어떤 체험이든 정신을 자극하는 일이라면 나에겐 의미 있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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