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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 경 Nov 19. 2020

올 해는 여전한가

 

 정기 모임에 나가지 않은 지도 일 년이 돼 간다. 정확히 말하자면 일 년에 네 번은 만나야 하는 모임인데 한 번도 성사되지 않았다. 물론 팬데믹이 시작되고부터이다. 올 해는 서로 언택트로 안부 묻는 것에 만족하자는 무언의 합의가 이뤄졌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진다.’고 했던가, 비록 네 번이지만 서로의 근황을 묻고, 눈빛을 주고받으며 허심탄회하게 마음을 열고 공감하는 시간은 메마른 일상의 윤활유가 되었고, 사막과 같은 세상에 단비가 되었다. 서로를 끈끈한 정으로 이어 주어 혼자라는 외로움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게 했다.  


 ‘사랑하는 친우 여러분 아쉽지만 올 연말 모임은 가족과 함께 하고, 내년 건강한 모습으로 만나요.’  단톡에 올라온 글이다.


 추억이 담긴 우정의 감정을 최대한 절제하고 최소한의 이해와 배려를 구하는 함축적이며 경제적인 문구로 오프라인의 만남을 대신한 온라인 속의 짧은 만남은 이상야릇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서글픔이나, 허탈감 같은 것이라 해도 무방하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은 때때로 삶을 괴롭힌다. 마음과 다르게 움직이는 세상사,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배신을 한 것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 일단 그렇게 믿게 되면 그 정체의 진위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내 편이 아니라는 사실만으로 분노하고 절망한다. 그러다 시간이 흐른 뒤에 알게 된다. 착각과 오만의 정체를.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으며 변하는 것들만 있을 뿐이란 사실을.


 세상이 변하는 것은 당연하다. 세상에 던져진 나 또한 그렇다. 그럼에도 투덜거리며 반항하는 것 또한 당연하다. 숙명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굴러 떨어질 줄 알면서도 산꼭대기로 바위를 밀어야 하는 시지프스처럼, 반복되는 삶의 고단함이 마치 형벌처럼 느껴지는 건, 머리로 이해하면서 가슴으로 밀어내는 모순과 같다.


 ‘얼굴은 보지 못하더라도 가끔 목소리라도 좀 듣자!’


 전화 너머에 들려오는 친근한 목소리는 톡보다 인간적인 매력이 있다. 톡의 간편하고 신속한 힘은 인정하지만, 간혹 제멋대로인 문자와 이모티콘의 나열은 가볍고 즉흥적인 인상을 주어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고 교감하기 어렵다. 답을 보내는 나 자신도 의무적인 행위처럼 느껴져 가끔 상대에게 미안함마저 든다.


 목소리는 모습을 보지 못해도 상대의 표정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다. 소리에서 전해지는 미세한 떨림은 마음의 상태를 알려주기도, 감정을 드러내기도 한다.


 숨이 찬 듯한 친구에게 청소를 했냐고 물었다. 친구는 그렇다고 하면서 가구를 이리저리 옮기다 장 속에 넣어두었던 앨범을 보게 되었고, 몇 년 전 가을 단풍 아래서 찍은 사진을 발견했다고, 끝말을 잇지 못하는 친구의 물먹은 목소리에서 짙은 우수가 느껴졌다.  옛 생각이 나서 전화를 한 모양이다.


 올 해도 얼마 남지 않았다. 늘 맞는 연말이지만 이번 해는 정말 많은 것들이 변했다. 그래서 오히려 더 특별하다. 처음 당황과 두려움은 어느 정도 덤덤해졌다. 이렇게 적응하고 또 순응해 가나 보다.


  비록 예전처럼 연말 모임이나 근사한 여행 같은 힘들게 됐지만 마음과 정신은 더 분주하고 치열해졌다. 많이 생각하고 매 순간을 느끼며, 현재에 충실하고 싶다. 지금의 결핍은 부족함을 채우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불안과 상실의 시대에 나를 지탱해주는 것들에 전념하고 싶다. 사랑하는 가족들, 친구들, 그리고 글을 쓰는 일, 공감해주는 독자들이 버팀목이 돼 준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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