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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 경 Nov 16. 2020

힘 내

 

“가진 게 없어 버릴 것도 없어.”


 그녀의 입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니 조명이 흐릿해 분명하진 않았지만 그렇게 말한 것 같았다. 희미한 조명 아래 주변은 흔들리고 있었고, 때론 뭉그러지고 일그러진 것처럼 보였다. 우린 생전 먹지 않던 술을 들이켜고 있었다. 무슨 말인지 궁금했지만 그녀가 먼저 말할 때를 기다렸다. 아니 어쩌면 말하지 않기를 바랐는지 몰랐다. 조금 벌어진 창문 틈으로 주춤 다가오는 서늘한 밤공기가 슬며시 맥주에 스며들어 거품을 거둬내고 싱겁고 쌉쌀한 맛을 남겨 두었다.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미열에 들떠있는 듯 간간이 들려왔다.


 심각한 표정을 잘 짓지 않던 그녀였기에 왠지 낯설게 느껴졌다. 붉은 조명 아래 그녀의 취기 어린 눈이 게슴츠레 보였다. 그녀는 거품 빠진 맥주를 한 모금 마시다 사래가 들어 기침을 하면서 가슴을 쳤다. 마치 단단히 걸린 무언가를 꺼내고 싶어 하듯.


“나 남편이랑 헤어지기로 했어.”


 순간 먹다 남은 음식으로 시선이 갔다. 돈가스는 반이나 먹었을까, 바싹하던 튀김은 질척한 소스에 물컹해져 있었고, 나무로 만든 오목한 접시에 밥풀 튀기와 강냉이는 대비되는 크기에 상관없이 무질서하게 섞여 있었고, 도자기 그릇에 담긴 과일은 윤기를 잃어 거무튀튀하게 변해 있었다. 분명 처음 나왔을 땐 먹음직스럽던 음식들인데 후줄근하기 짝이 없었다.



 “ 나 솔직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이럴 땐 위로란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다.


 “ 우리 술이나 더 마실까? 아니면 나가서 길을 걸을까? 아무튼 너랑 함께 있어줄게.”


 우리는 주점을 나왔다. 밤바람이 차갑다. 계절은 그것을 제대로 느끼려 할 때 사라져 간다. 무엇이든 그렇다. 삶은 왜 한 발자국씩 늦는 건지 모르겠다. 사랑도 이별도 그것이 지나간 후에 알게 된다. 나는 친구의 손을 끌어다 내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손이 찼다. 다행히 내 손은 따뜻했다. 친구와 나는 말없이 노란 은행잎이 덮인 가로수 길을 걸었다. 불빛 속이어서 좋았다. 물기를 머금은 눈이 예쁘게 빛나기에 좋았다.



 ‘가진 게 왜 없어 너에겐 긍정이 있잖아 그리고 함께 이렇게 걸을 수 있는 친구도 있고.’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친구에게 분명히 내 맘이 전해졌을 것이다. 때론 어떤 말보다 서로 바라보는 눈길이, 꽉 잡은 손이, 따스하게 전해지는 체온이 더 많은 말을 하고 있음을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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