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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 경 Mar 21. 2018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정한 자유란 무엇인가?  늘 부딪치는 문제에 대한 답을 어느 정도 얻을 수 있었던 책, 「그리스인 조르바」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일 자체가 억압이고 구속이라 느낄 때, 현실의 굴레에서 무엇 하나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무력함과 체념이 엄습할 때, 소심하고 게으른 영혼에 경종을 울리며 가혹한 질타를 해 주던 위대한 인간, 조르바를 만났다.


주체적 삶의 정수인 자기애가 바탕이 돼야 타인을 사랑할 수 있다는 심오한 철학을 행동으로 보여준 조르바, 과거  죄로 얼룩졌던 삶에 대한 자기혐오와 연민을 극복하고, 깨달음을 통해 자신과 세상을 사랑할 수 있었던 관대함과 용기는 그를 비범한 인간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거칠고 야성적인 조르바를 진정 아름답게 해 주는 것은 멈추지 않는 삶에 대한 열정, 솔직하고 순수한 감정 표현이 아닐까 생각했다.


책의 저자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그리스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사물을 섬세하고 깊이 있게 묘사하는 탁월함과 생의 본질을 꿰뚫는 예리한 통찰력을 지니고 있다. 그의 그리스적 사고의 바탕인 지성과 합리성은 조르바라는 인물과 조우하면서 큰 변화를 겪게 되고, 정신과 육체가 조화를 이루어야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진리를 체득한다.

소설의 화자인 ‘나’는 젊은 시절의 작가이다. 그가 조르바를 처음 만나게 된 곳은 아테네의 항구 도시 피레에프스, 그는 크레타 섬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그만 카페에서 배를 기다리고 있는 화자의 눈에 비친 바다 풍경과 뱃사람들의 모습은 원초적 생명력으로 가득 차 있다. 비록 사람들의 대화는 고달픈 삶의 현실을 말해 주고 있었지만, 그것이 인생의 본질이란 생각이 들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 자연과 인간이 투쟁하며, 이해하며, 때론 순응하는 모습.


그가 사랑하는 친구와의 이별을 생각하며 슬픈 감정의 실타래를 풀어내는 문장은 너무나 서정적이고 아름답다. 내가 카잔차키스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글의 표현력 때문이다. 언어의 마술사, 절묘하고 풍부한 비유의 향연은 책을 읽는 내내 감성을 자극한다.

‘사랑하는 친구와 서서히 헤어진다는 것은 얼마나 쓰라린 일이가! 단칼에 베듯 이별해 버리고서 고독 속에 남는 편이 훨씬 나으리라…, 고독이야말로 인간 본연의 상태니까,’  “다시 보세 이 책벌레야!”

친구와의 대화 속에서 ‘나’의 핵심적 본질이 드러난다. ‘나’가 그토록 변하고 싶고 갈망하는 것, 하지만 끝내 변할 수 없는 근원적 형질, 성향, 그래서 조르바를 통해 배우고, 채우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이 갖지 못한 것에 대한 동경과 열망, 감탄이 더욱 컸으리라. 책에 길들여진, 모든 것을 생각하고 분석해서 결정하고 행동하려는 그의 냉철한 이성이 충만한 감성을 억압한다.

조르바를 만난 화자는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조르바의 몸으로 체득한 풍부한 삶의 경험과 사물의 이치를 통찰하는 그의 직감과 원초적 감성에 매료된다.

화자는 조르바를 자신의 갈탄광산의 감독으로 임명한다. 조르바의 냉소적이면서도 불길처럼 섬뜩하고 강렬한 시선에 깊은 인상을 받은 ‘나’는 그와의 만남을 숙명적 사건으로 받아들인다.


조르바와 화자는 너무도 다른 기질을 지녔다. 호기심이나 궁금한 점뿐만 아니라 자신의 감정과 생각들을 거침없이 드러내며, 정화되지 않은 거칠고 비속한 말을 쏟아내는 조르바, 때론 감정의 질곡을 산투르 연주와 춤으로 표현한다.

현재에 충실한 그의 삶에 비해 ‘나’는 과거에 얽매어 삶을  반추하며, 끊임없이 그것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래서 그의 내면의 고뇌는 클 수밖에 없고, 마음의 펑정을 얻기 위해 해탈한 붓다를 찾는 것은 아닌지, 지식인이란 ‘식자우환’의 한계를 벗어나기 힘든 것인지 모르겠다.


기질이 다른 그들은 자주 충돌한다. 조르바는 여자에 대한 애정을 숨김 없이 표현하며, 즉각 행동으로 옮긴다. 반면 화자는 과부에 대한  솟구치는 욕망을 억눌러 조르바의 비웃음을 사곤했다. 특히 여성 편력이 심한 조르바는 여자들을 비하하거나 여성을 남성의 소유물 취급하는 언행과 행동을 한다.  여성에 대해 음란하고 저속한 표현들이 나올 때는 솔직히 심한 거부감이 느껴 졌다. 하지만 실존 인물인 조르바와 작가 카잔차키스가 살았던 그 시대는 남성중심 사회로 교육에서 소외된 여성들의 지위는 매우 낮았으며, 그런 무시와 차별이 인습 속에 팽배했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도 있다. 그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조르바와 화자는  나름 여성을 불쌍하게 여기며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  여성을 출산과 성적 도구로 여기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마녀 사냥을 당할 위기에 처한 과부를 구해주려 했으며, 조르바는 과거 카바레 여가수였던 오르탕스 부인을 사랑해 주고, 여인의 소망대로 아내로 맞이하려 했다. 그는 여자의 마음을 이해할 줄 알았고,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도 지는 진정한 사나이었다.


조르바는 화자를 ‘두목’이라 부르며, 그와 깊은 우정을 나눴다. 조르바의 삶에 대한 열정은 작품 곳곳에서 볼 수 있다. 그는 무엇에 미치면 앞뒤 생각하지 않고 달려간다.

그가 여러 나라를 전전하며 경험했던  무용담을 들려줄 때면 신기할 정도이다. 특히 그리스를 위해 블가리아인, 터키인들과 싸우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을 죽이고, 참혹한 체험을 했는데, 블가리아 신부를 죽인 후 신부의 어린 자식들이 구걸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조르바는  아이들에게 자신이 가진 것을 다 주고 다시는 전장에 돌아가지 않았다. 그 체험으로 그는 민족과 이념을 초월한 인간 본연의 삶의 가치를 터득하게 됐을 것이다.


여자를 사랑할 땐 사랑에 푹 빠져 상대에 진심을 다하고 충실했다. 탄광 일을 할 때엔 위험도 마다하지 않고 열정을 다해 일을 했다. 광부들에게도 일에서는 엄격했지만, 일이 끝난 후에는 누구보다 그들을 따뜻하게 대했다. 때론 너무 즉흥적이고 충동적이라 느껴지는데, 그것은 현재에 모든 의미를 부여하며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그의 모습 때문이다. 가장 조르바다운 특징이며, 그의 삶을 관통하는 자유로운 영혼의 발현이었다.

화자와 조르바가 계획했던 산림 운반 케이블 설치가 실패하면서 사업은 망한다. 결국 둘은 헤어지게 되고, 조르바와 영원히 이별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화자는 슬픔을 느낀다.


「먹이를 채는 새처럼 목을 뽑고 묵묵히 술만 마시고 있는 조르바를 바라본다. 우리의 인생이란 얼마나 잔혹한 신비인지,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처럼 만났다가 헤어지는데, 우리의 눈은 하릴없이 사랑하던 사람의 얼굴모습, 몸매와 몸짓을 붙잡으려 애쓰니…, 부질없어라, 몇 년만 흘러도 그 눈이 검었던지 푸르렀던지 기억도 못하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기 싫어하는 마음이 구구절절 느껴지면서, 문득 서양과 동양의 이별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를 느꼈다. 화자는 헤어짐을 허무함으로 바라봤지만, 동양사상인 ‘회자정리’의 시선에서 이별은 결코 허무한 것은 아닐 것이다.


소설은 어떤 극적인 갈등과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이 아닌, 주로 조르바의 인생 역정을 화자에게 들려주거나, 화자와 조르바의 일상적이며 소소한 대화, 화자의 명상과 내면의 고뇌, 갈등을 담담히 들려준다.


작가는 책에서 인생의 길을 찾고, 붓다에게서 영혼의 구원을 얻고자 했지만, 조르바를 만나면서 진정한 삶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삶이란 몸으로 부딪치고, 겪으면서 알아가야 한다는 것, 이론이나 학문에 얽매여 따지고 분석하다보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못 하거나 망설이게 된다.


사회의 울타리와 사람들의 시선에 갇혀 살아가는 우리네 삶에서 조르바처럼 자유의지대로 행동하고, 거리낌 없이 욕망을 성취하기란 힘들다. 잘못하면 충동적이고 방탕한 생활로 비춰질 수 있다. '조르바'라는 인물은 작가는 물론 우리 모두가 추구하는 자유 의지의 상징이다.  많은 제약 속에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자유에 대한 결핍이 많을수록, 그것을 채우고자 하는 열망이 강할수록 조르바의 정신은 더욱 빛을 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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