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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 경 May 02. 2021

하 루

 

 하루가 등 뒤에서 헛기침을 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가까이 와 등을 밀어댄다. 오늘도 등 떠밀리지 않으려 안간힘 쓴다. 천천히 갈 테니 너무 서둘지 말자고 회유해 보지만 흔들림 없이 앞서 가는 하루를 따라가느라 나의 하루는 언제나 숨이 차다.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서 잠을 깬다. 사실 하루는 나와 아무 상관없이 흘러간다. 잠을 자건 깨건 날이 밝으면 하루가 시작되고 날이 저물면 하루가 끝난다. 하루는 그저 반복되는 자연의 현상일 뿐이지만, 앞으로만 가는 시간을 잡고 싶은 마음에 이런저런 의미를 부여한다. 하지만 정작 의미도 모른 채 내재화된 습성들이 하루를 점령하고 통제한다고 느끼는 순간 하루는 무채색이 되기 일쑤다.


 하루는 밝고 어둠에 따라 시작하고 끝을 맺는다. 규칙적인 하루를 보내기 위해 효율이란 자동시스템이 삶 속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됐을까. 기계적이고 획일적인 삶을 혐오하면서도 결국 세상이란 거대한 메커니즘 속의 부품처럼 살아가는 자신을 인식하게 된다. 그로 인해 엄습하는 삶의 허무에 종종 몸살을 앓으며, 뒤를 돌아보지만,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먼 길을 와 버렸음을 확인할 뿐이다. 간혹 즉흥적 일탈을 시도해보지만, 시스템 오류로 하루가 틀어지게 되면, 하루를 내 마음대로 쓰는 날이 많아질수록, 하루가 강제하는 일들을 소홀히 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


 평일을 기준으로 하루를 삼등분한다면, 처음은 요리와 청소처럼 매일 치러야 하는 기본적인 일일 것이다. 빨래는 때와 상황에 따라 다르므로 하루 안에 치러야 하는 일에서 제외시킨다. 중간은 대부분 업무와 관련된 일을 하지만, 비교적 시간에 얽매이지 않기에 중간 시간을 적극 활용한다면 짧고 간단한 일은 처리할 수 있다. 끝은 그나마 하루 중 가장 자유로운 시간이다. 이런저런 상념으로 보내는 시간이 많지만, 대부분 수많은 하루 중 하나의 하루가 어둠과 함께 사라지는 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잠자리에 든다.


 하루가 나에게 온전히 주어진 날, 특별한 하루를 만들고 싶었다. 재촉하는 시간의 습성을 알기에 일찍부터 서둘렀다. 그러나 분주한 마음만큼 몸과 손은 따라주지 않았다. 점심이 지나서야 싱크대 위 수납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평소 보이는 곳만 정리하다 보니 가장 높은 위는 거의 손을 대지 않은 지가 꽤 오래되었다. 손이 닿는 곳에 필요한 식기가 놓여 있어서, 몇 군데 수납장은 특별한 날 이외에 거의 사용하지 않는 식기들이 무심히 채워져 있었다.


 수납장 위쪽, 오른쪽 칸은 디너 세트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큰 접시 위에 중간 접시 그 위에 작은 접시, 위에서 아래로 물이 흐르듯, 시간에 따라 일이 진행되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당연한 듯 깔끔이 정리돼 있었다. 손을 댈 필요가 없었다. 언제나 이곳에 붙박아 있었던 것처럼 그냥 그대로 있으면 됐다. 그런데 늘 이곳이 마음에 걸렸다. 책장 어느 구석에 박혀 있는 오래된 앨범을 펴지 못하는 찝찝함처럼.


 수납장 위쪽 왼쪽 칸도 마찬가지다. 사놓고 거의 써보지 못한 도자기, 유리그릇들이 키 순서에 맞게 열을 지어 서 있거나 앉아 있거나 포개져 있었다. 중에서 예전 신혼여행을 갔다 사 왔던 도기 세트도 있었다. 은빛 선이 테두리를 감싸고 있는 제법 고급스러운 접시와 종지 세트였다. 어두컴컴한 장 속에서, 시간이란 먼지가 고운 빛깔을 덮고 있었다.


 코로나 사태로 집안의 행사나 모임이 줄어들었기에 접대용 식기를 쓸 일도 거의 없어졌다. 매일 쓰는 식기만이 손이 닿는 곳에 늘 같은 모습으로 포개져 있었다. 오랫동안 쓰지 않은 그릇들, 무관심과 소외의 후미진 그늘 속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을 그릇들을 하나하나 꺼내서 살펴보았다. 결국 다시 제자리에 넣을 수밖에 없었지만, 알라딘의 요술 램프처럼 그릇을 닦고 쓰다듬으면서 지나간 하루 중 어떤 날들을 불러낼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하루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여기 그릇처럼 차곡차곡 쌓여, 기억과  추억이 휘발돼 사라지지 않길 바라며, 누군가의 부름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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