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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 경 Jul 16. 2021

내가 살던  마을이 있었다.

 

   여름이 한창이었다.


 소금에 절여진 배추처럼 하염없이 늘어지는 오후였다. 잠시 전 소나기가 광기를 부리듯 무섭게 바닥을 때리고 지나갔다. 비에 젖은 옷과 가방이 쇠잔해진 육체를 무겁게 눌렀다.


 버스 한 대가 나태한 걸음걸이로 천천히 다가와 섰다. 흔한 전광판도 없는  초라하고 오래된 정류장 앞에 서자 모든 게 오래전 모습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풍경도, 시간도, 기억도.


 사라졌던 차멀미가 다시 생겼다. 몇 명 태우지 않은 마을버스는, 비었다는 걸 티 내듯, 덜컹거리며 심술부렸다. 날도 더운데 에어컨을 돌리기엔 인원수가 턱없이 적다고, 적자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모든 창문들을 활짝 열어젖힌 채, 어서들 타라고 아우성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바람과 달리 마을버스는 기다리는 사람 없는 정류장을 무심히 지나치고 있었다.


 작은 입술이 달싹였다. 시간은  되돌릴 수 없어도 기억은 되돌릴 수 있다고, 그러기 위해선 이 정도 불편 감수할 수 있다고,  벌써 지친 것은 아니라고, 스스로의 핀잔에 가벼운 조소가 입가에 번졌다. 차창 밖으로 펼쳐진 풍경들을 바라보았다. 기억과는 아무 연관도 없는 것처럼 무심했다. 먹구름이 다시 몰려왔다. 들썩이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마치 책망이라도 하듯,  비가 다시 쏟아질 기세이다. 팔월  그날처럼.


 사실, 지하철을 타고 다시 일반버스로 갈아타서 이곳 마을 버스정류장까지 오는 동안 너무도 많은 것들이 변해 있었다. 세련되고 잘 정리된 건물과 주거단지, 공원들이 위치한 곳에 예전 무엇이 있었는지, 힘겨운 과제를 푸는 학생처럼 기억을 되살려야  했다. 그러나 이내 부질없음을 느꼈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고 의 기억이란 얼마나 왜곡되고 부서지기 쉬운 건지, 그걸 인정해야  제대로 기억할 수 있다.


 신기하게도 마을버스가 가는 길은  시간이 멈춘 듯, 변하는 세상 밖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고풍스러운 산이,  예전 그 모습대로 시야에 들어와서였을 것이다, 아무리 주변이 변해도 산이 주는 정취만큼은 낯설지 않았다. 산을 중심으로 기억 속 희미한 장소들이 퍼즐처럼 하나하나 맞춰지는 느낌이었다. 그때  버스 스피커에서 귀에  익은 지명이 흘러나왔다. 병원 건물 이미 없어졌는데도 하차할 정류장 이름으로 그 존재의 흔적을 여전히 남기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렸다. 예전 병원이 있던 자리와  그 부근은 이미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지 꽤 된 듯했다. 오래전 이곳에 왔을 때는 빈 터였는데, 아마 개발이 시작됐을 시기 같다. 개발의 대명사가 아파트가  모든 지상을 점령했다 해도 이상스러울 게 없다. 예전 모습을 더듬는 눈길이 황망할 따름이었다.


 아파트는 제법 큰 산을 배경으로 서  있었다.  아파트 맞은편은 당연히 있어야 할 것들이 있었고, 그 뒤쪽으로는 개발의 이름으로 허물었어야 하는 것들이 있었다. 놀랍게도, 아직 버티고 있었다. 예전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단출한 집들과 작은 도로들이.


  내가 살던 마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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